권오신객원논설위원로타리 코리아 차기위원장
왕희지와 왕헌지는 중국 서예 역사에서 2왕(二王)으로 불린다. 재주가 뛰어났으나 놀기를 좋아했던 헌지는 어느 날 큰대(大)자 한자만 써놓고 동무들과 놀이를 나가 버리자 아버지 왕희지가 한 점을 더 찍어 태(太)자로 만들었다.

헌지의 글씨를 본 어머니는 “가운데 점획을 잘 찍었다”고 칭찬했다. 어머니의 말에 자극을 받은 헌지는 그길로 용맹 정진에 들어가 마당에 둔 18개의 항아리 물을 먹물 가는데 다 쓰고 나니 붓 길이 제대로 보이드라고 했다.

왕희지를 평생흠모하고 그 필체의 비법을 알기위해 수 천 자루의 붓이 닳도록 글을 쓴 석봉 한호(韓護)가 남긴 일화도 예외가 아니다.

세 살 나든 해 아버지를 여의고 떡 장사를 한 홀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자란 석봉은 종이가 없어 땅바닥과 가랑잎 위에 습자를 했다. 소년시절 석봉과 어머니의 떡 썰기는 피나는 연마를 후세에 전하는 일화다.

석봉은 중년에 들어 자기체를 완성시켰다. 왕희지 글체를 보고 연마를 했지만 왕희지·헌지와 고려 말부터 유행된 송설체의 부드러움을 뛰어넘어 아름다우면서도 단아하고 엄전한 석봉체(石蜂體)를 만들어 냈다.

생전에 가평군수까지 올랐으며 사후에 승지 벼슬이 내려졌다. 석봉의 글씨를 본 명나라 학자는 “사자가 돌을 부수고 목마른 말이 물을 향해 달리는 듯하다”고 격찬했다. 이런 내용은 황해남도 토산군 석봉리에서 지난 4월 발견된 한석봉의 묘비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

자신이 명필이기도 했던 선조는 대마도주(島主)가 현판글씨를 써달라고 하자 닭을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쓰겠느냐면서 다른 사람의 글을 쓰게 하라 할만큼 조선에는 명필가로 넘쳤다.

옛 선비들은 명필로 가기위해서 끊임없는 수련을 했다.

저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를 남긴 추사 김정희(1788~1856)도 고졸(古拙)한 아름다움이 특징인 추사체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70평생 붓을 놓을 때까지 1만권의 책을 가슴에 품고 벼루 10개를 바닥냈으며 붓 1천자루를 몽당필로 만들었다고 한다.

붓을 잡고 오체를 쓰는 연습은 평생 동안의 수양과정이기도 했다.

추사는 글씨만 잘 쓰는 명필이 아니다. 한 글자 한 글자의 뜻을 먼저 알고 혼을 담아 쓰는 금석학을 아우르는 대학자였다.

영천 은해사에는 추사가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나 한강변 마루도 없는 집에서 곤궁한 시절을 보낼 때 쓴 것이지만 추사체가 완성된 시기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현판 `대웅전(大雄殿)`이 걸려있다. 추사의 글씨는 경주옥룡암에 남아있다. 무장사지 비문을 보러왔다가 경주 옥룡암에 들려 `一爐香閣`을 써준 것으로 전해진다.

후세사람들이 눈이 없어 보지 못할 뿐이다. 붓으로 글을 쓰고 사군자를 쳐도 기예(技藝)로 그치지 않고 글을 쓰는 행위로써 정신세계에 들어가려 했다. 그래서 서예라 하지 않고 서도(書道)라 했다. 마음이 바르면 글씨도 바르다(心正則筆正). 글씨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觀書知人)는 말은 서예를 통한 수련의 깊이를 말하는 것이다.

명필이라 해도 인품이 따라가지 않으면 존경을 받을 수 없다.

북송(北宋)의 채경, 원(元)나라의 조맹부는 당대에 손꼽히는 서예가(書藝家)다. 부드러우면서도 아름다운 조맹부의 송설체는 우리나라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지만 마음으로 존경하지 않았다. 채경은 아첨으로 재상자리를 16년이나 누렸고 조맹부는 송나라 왕족 후손이면서 원나라를 섬겨 출세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안중근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쓴 글씨들이 국내 미술시장에서 지금껏 최고 글씨 값을 누리는 이치도 기개와 인품이다. 서예를 통해 정신 연마를 하던 어린이들이 마저 겨울 여름방학에서 조차 컴퓨터만 찾을 뿐이니 그 정신세계가 거칠고 참을성이 부족한 세대가 양산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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