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년 前 동검 358자루 유적지서 발굴
“일본서기엔 금·은의 나라는 신라 지명”

우산을 쓰기도 안 쓰기도 애매한 날씨다. 태풍이 동쪽을 지나가고 있다는데 그만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이즈모 박물관으로 들어간다. 

박물관 중앙 로비에는 이즈모타이샤 경내에서 출토된 대형 기둥, 우즈바시라(宇豆柱)가 전시되어 있어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삼나무 세 그루를 묶어 직경이 3m가 넘는다고 한다. 신전의 높이는 48m이고 계단의 길이만 109m라고 한다. 일본 제일의 목조건축물이다. 치기는 신사의 지붕위의 양끝에 X자 모양으로 교차시키는 목재인데 하나에 500kg이 넘는다. 가로지르는 나무는 더 무거워 700kg이 넘는다고 한다. 이는 오오쿠니누시가 천손에게 나라를 양도하면서 천손이 천황의 지위를 이어가는 것처럼 땅 속의 반석에다 두텁고 큰 기둥을 세우고 타카마노하라(高天原)에 닿을 만큼 높은 신전을 지어달라고 했던 스사노오미코토 후손들의 자부심과 같은 것이다.

글 싣는 순서
신화의 무대 日 이즈모시 방문기

<3> 이즈모 박물관 동검 주인은 누굴까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는 아시하라노나카쯔쿠니(葦原中國)를 자신의 손자인 니니기노미코토(邇邇藝命)에게 다스리게 하려고 하나 아시하라가 너무 소란스러웠다. 스사노오미코토의 자손들인 오오쿠니누시노카미(大國主神)와 그 아들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곳을 평정하기 위해 두 번이나 신을 보냈지만 실패한다.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는 다시 아메노토리후네(天鳥船神)로 하여금 타케미카쯔지노오노카미(建御之南神)를 수행하게 하여 아시하라로 보냈다. 두 신은 이즈모로 내려와 토쯔카쯔루기를 거꾸로 파도에 꽂고 오오쿠니누시노카미에게 나라를 양도하라고 요구한다. 그의 아들들이 그와 겨루었으나 실패하고 오오쿠니누시노카미는 `아시하라노나카쯔꾸니를 천손의 명령대로 바칠 테니 거주할 만 한 신전을 지어 준다면 구석진 곳에 숨겠다`고 했다.

드디어 니니기노미코토가 천상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천신 니니기노미코토의 자손이 일본의 초대 천황 진무(神武)가 된다.

1984년 고진다니(荒神谷)유적에서 무려 358자루의 동검이 발견되었다. 당시 일본 전역에서 발견된 것이 300자루가 되지 않았다. 어떤 연유에서 동검은 2000년의 세월을 한꺼번에 묻혀 있어야 했을까? 그러나 아직 시마네 현에서 동검을 직접 제작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도 바다를 건너 온 것인가?

종합전시관에는 `다타라(タタラ)제철`의 모형이 눈에 띈다. 다타라 제철이란 점토로 만들어진 용광로에 목탄을 때서 사철을 녹이고 철을 만드는 기술을 말한다. 6세기 경으로 보이는 가장 오래된 제철로가 이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질 좋은 사철이 나고, 삼림 자원이 풍부한 시마네는 전국 최고의 철 생산량을 자랑했다고 한다. 1882년에는 전국 생산량 1만2천200t 중 6천400t을 이곳에서 생산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다타라`라는 말이 한국에서의 `두두리`와 같은 맥락일 수 있다는 것이다. 원래 다타라는 풀무 작업을 의미했는데 제철 작업 전체를 포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사철을 하는 공간에는 `다타라`라는 지명이 두루 남게 되었는데, 일본서기에는 `금과 은, 진보의 나라`, `금 ·은의 나라`로 표현되는 신라의 지명이라고 되어 있다.

박물관에서 약 5분 남짓 걸어가면 바로 이즈모타이샤다. 오오쿠니누시로부터 나라를 양도받은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는 거대한 신사를 짓고 아들 아메노호히노미코토(天穗日命)로 하여금 제사장을 맡도록 했다. 제사장은 이들의 후손이 대대로 맡고 있다. 신사로 들어서면 신락전(神殿, 拜殿) 정면에 거대한 금줄이 참배객을 압도한다. 길이가 약 13.5m이고 폭이 약 9m이며 무게가 무려 5t에 이르는 일본 최대의 시메나와(注連繩)다. 본전은 공사 중이었다. 이곳에 오오쿠니누시노카미를 모신다. 스사노오는 이즈모대사의 본전 뒤 소가샤(素?社)라는 조그만 신사에 모셔져 있다. 오오쿠니누시는 천황가에 복속되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스사노오를 따르고 있다는 상징처럼 보인다.

(계속)

이상모· (사)도시전략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