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되거두기
(59) 되거두기
  • 관리자
  • 등록일 2010.11.29 21:08
  • 게재일 2010.11.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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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집 근처에 갈 일이 있었다. 볼일이 끝나서야 혼자 계실 엄마 생각이 났다. 바쁘게 뛰어다닌 탓인지 목이 칼칼해지고 기침마저 돋는다. 당신 좋아하는 회를 사드리고 엄마집에서 한 숨 쉬고 가야지 하는 맘에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는다. 노구를 이끌고 멀리야 가셨겠나 싶어 일단은 들렀다.

혼자 사는 노인의 살림살이는 옹색하기 그지없다. 원체 바지런하고 정갈한 여인이었지만 늙으니 별 수 없구나 싶다. 다섯 남매 바지주름이 난초 뒷결처럼 날렵했다는 젊은 날의 엄마 자화자찬성 회고는 옛말이 되어버렸다. 씻어 엎어놓은 커피잔 바닥엔 물때가 끼어 있고, 금 간 밥공기엔 더께 낀 시간의 흔적이 선명하다. 다리에 힘 빠지고, 손놀림이 굼떠진데다 눈마저 침침한 당신에게 예전의 살림솜씨를 기대할 수는 없으리라.

엄마의 세간이 두서없이 보이는 건 연세 탓도 있지만 도무지 뭘 버리지 못하는 성정 때문이기도 하다. 음식물쓰레기 줄이는 것을 국민 된 최대의 도리로 알고 있는 선량한 엄마는 콩나물대가리 하나, 밥찌끼 한 알 허투루 버리지 않는다. 당신에게 뭔가를 버린다는 건, 악마의 유혹에 빠지는 거나 마찬가지다.

몇 십 년은 넘었을 재봉틀부터 앞코가 다 헤진 효도화까지 내 눈엔 버려야 할 것투성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병적인 버리기의 명수 아니던가. 갑자기 신성한 소제욕이 발동한다. 저 남루하고 허섭스레기 같은 세간들을 표 안 나게 치워버려야지. 엄마의 쾌적한 주거 환경을 위해 친정을 다녀가는 식구들 그 누구라도 그런 적이 있다.

귀 떨어진 냄비, 효용성을 다한 겨울 내복, 굽 뭉그러진 구두 등 그동안 엄마 몰래 우리 형제들이 처리한(?) 물건들은 종류도 다양했다. 버리다 들킨 적도 있는데 그 땐 무슨 보물을 없애기라도 한 것처럼 분해하신다. 그 물건들을 원상 복귀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대신 들키지만 않으면 당신은 그 물건들이 없어진 지도 잘 모른다. 그걸로 보아 엄마에게 그 잡동사니들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저 어려운 한 시절을 보낸 어른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습관적으로 쉽게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시간은 가도 엄마는 오지 않는다. 피곤 끼로 기침이 잦아졌지만 버리기의 달인은 신이 났다. 낡은 비로드 저고리랑 구멍이 숭숭 난 여름 내의, 유행지난 털 슬리퍼까지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추억조차 되지 못할 남루의 표식들을 하나 가득 채우니 배고픈 것도 잊겠다. 엄마 몰래 내 차에다 싣고 올 참이었다. 그 때 엄마가 돌아왔다. 봉투를 치울 새도 없이 들켜버렸다. 아직 멀쩡한 것들을 왜 버리느냐고 정색을 하신다. 자식들이 사다 나른 새 찻잔, 새 내의, 새 신발은 아껴서 뭐하느냐고 당신 앞에서 말해봤자 통할 리 없다. 체념하고 쓰레기봉투의 짐들을 되부린다. 좀 슨 벨벳 저고리도, 낡은 런닝셔츠도, 찌그러진 털신발도 엄마 품을 파고드는 굶은 새처럼 제 자리로 돌아간다.

멋쩍어진 나는 찬바람 도는데 어딜 그리 다니시냐고 심통을 내본다. 배낭에서 은행알 봉지가 나온다. 그제야 기관지가 약한 딸 주려고 늦가을마다 은행을 준비하는 엄마가 떠오른다. 오늘도 은행을 가져가라는 친구를 만나고 오는 중이었다. 하필이면 목감기 중이라 기침을 숨기려 해도 엄마 앞에서 더욱 잦아질 뿐이다. 내 몸을 나보다 더 알고 계시는 노구의 엄마. 원래 자식은 버리고 부모는 거두는 것일까. 하잘 것 없는 자식이란 짐을 함부로 내치지 않고 보물인양 그러안는 일, 그게 엄마란 이름의 업보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된 마당에, 깨지고 금가고 먼지 많은 내 영혼의 남루마저 잠시나마 엄마 앞에 부려놓기로 한다. 초췌를 다 부리기도 전에 엄마의 일갈이 내 기침소리를 넘어선다. -엄마 걱정하지 말고 니 몸이나 건사해라. 지발 내년에는 은행 안 구해도 되게.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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