콤플렉스 용어를 가장 강조한 이는 칼 구스타브 융이었다. 그에 의하면 누구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종류도 얼마나 다양한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외모 콤플렉스, 학벌 콤플렉스, 슈퍼우먼 콤플렉스, 온달 콤플렉스 등, 이름 붙은 세상의 모든 것에 콤플렉스라는 말을 접목시켜도 될 정도이다. 전문적인 심리학 개념을 떠나 어릴 적 경험, 사소한 습관, 주변 환경 등에 의해 생겨난 복합적인 소용돌이가 콤플렉스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런 인간 심리를 잘 이해해서일까. 융에 의하면 우리가 콤플렉스라는 말을 붙이길 좋아하는 것은 반드시 잘못된 것만은 아니란다.

간단하게 `마음속 응어리` 로 정의해도 무방할 콤플렉스는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 스스로를 위축시키고 상처를 덧키운다. 하지만 적당하면 에너지원이 되고 자기발전의 단서가 되어준다. 하지만 그 적당하기가 어디 쉬운가? 그런데 그것을 넘어 아예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는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상의 승리자라 할 수 있겠다. 의외로 이런 초탈한(?) 마인드를 가진 사람을 만날 때가 있는데 속으로 뜨끔해진다. 가당찮게도 대부분이 나처럼 많은 콤플렉스를 안고 살아간다고 착각했는데, 그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를 깨치게 되니 부끄러워서 뜨끔해지는 거다.

L여사는 언제 봐도 유쾌하다.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지만 안부를 전해오는 그미의 문자에는 나름의 철학적 사유가 배어있다. 모기 물린 뒤에 느끼는 순간의 울림, 장마 끝에 솟구치는 내면의 잔상, 동네 할머니와 나눈 대화 등을 맛깔스런 짧은 문자로 보내오는데 그 균질하고 매혹적인 감성적 철학에 이끌려 절로 답문을 쓰게 된다.

어제 그미가 보내온 문자는 이러했다. `인연의 뿌리는 하늘이 내려줍니다. 하지만 그 뿌리, 단단해지고 줄기 살찌우는 건 사람의 몫이지요.` 혹시라도 `사람 몫`을 제대로 하지 못한 건 아닌가 싶어 곧장 답문을 보냈다. 그대를 위해 잠깐 문자하는 것도 인연의 나무를 가꾸는 거겠지요, 라고.

다음날 그미는 점심을 같이 하자며 찾아왔다. 언젠가부터 건네고 싶었다며 멋진 부츠를 챙겨왔다. 두 번 신은 것인데 굽이 너무 높아 자신은 못 신겠다는 거였다. 짧은 하체 소유자인 나에게 높은 굽은 필수이기에 잘 됐다 싶었다. 하지만 하체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나는 저 신발을 소화할 수 있을까, 하고 내심 망설이고 있었다. 내 주저를 눈치라도 챘는지 그미가 에피소드 하나를 공개한다.

백화점에 갔더란다. 화장품 코너를 지나는데 메이컵 아티스트가 화장을 해주겠더란다. 얼떨결에 메이컵을 받고 있는데 남자 아티스트가 말하더란다. 얼굴 중 콤플렉스가 있는 부분을 얘기하면 그곳을 집중적으로 보완해 주겠다고. 그미의 대답엔 주저함이 없었단다. 저, 콤플렉스 없는데요. 남자 아티스트는 멍한 표정으로 네, 네 하기만 하더란다. 아마 그 아티스트도 나 같은 맘이었나 보다. 모든 사람은 콤플렉스가 있고 그것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넘겨짚었음에 틀림없다.

콤플렉스 없어요, 라고 대답한 L여사의 말엔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한다는 뜻이 담겨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의 결점을 보듬는 자는 남의 약점 같은 걸 눈여기지 않는다. 콤플렉스는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정작 타인들은 상대가 어떤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지 의식조차 하지 않는다.

부츠 끈을 느슨하게 풀어 젖힌 뒤 조심스레 한 발을 넣어본다.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맞춤하다. 각선미 빼어난 모델 같은 핏은 상상할 수 없지만 L여사가 준 명쾌한 답으로 자기체면을 걸어본다. 저, 콤플렉스 없는데요. 저기 저 거울 속, 제 약점을 넘어서려는 한 여자의 부츠 굽, 산봉우리만하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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