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사실 울었어요. 나한테는 왜 이렇게 매번 어려운 역이 들어올까 싶어서요. 하지만 그때 한 번뿐이었어요. 그렇다고 놓치기엔 유경옥이 너무 마음에 드는 캐릭터였거든요.”

배우 김서형(37·사진)이 SBS TV 대하드라마 `자이언트`에서 나이를 잊은 연기를 펼치며 자신의 커리어를 또 한뼘 확장시키고 있다.

그가 맡은 유경옥은 싸구려 술집의 작부에서 지하경제의 `큰손`으로 성장하는 인물. 만보건설 황태섭(이덕화 분) 회장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지만 딸 앞에 엄마라고 나서지 못하는 그는 이 남자 저 남자의 품을 떠돌며 웃음을 팔다 인생의 은인인 백파(임혁)를 만나 삶이 송두리째 바뀐다. 천하기 그지없던 외양에서는 이제 세련미가 줄줄 흐르며 경박했던 웃음이 떠난 자리에는 단호한 카리스마가 자리한다.

최근 경기 고양 탄현SBS 제작센터에서 만난 그는 “유경옥의 캐릭터는 정말 멋지다. 배우로서 언제 이렇게 스펙트럼이 넓은 연기를 해보겠냐”며 “강한 여자지만 최대한 따뜻하게 보이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따뜻하게 보이려` 노력하는 이유는 그가 이 역할 제안을 받았을 때 울었던 이유와 같다. 바로 `엄마` 역이기 때문이다. 물론 엄마 역은 처음이 아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정이 좀 다르다. 그의 딸이 박진희(32)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5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배우와 모녀지간을 연기해야 하는 것이 큰 부담일 수밖에 없다.

“꼬마의 엄마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의 엄마라니 너무 하잖아요.(웃음) 처음에 제안을 받자마자 `전 못해요`라고 단번에 거절했어요. 제가 나이가 꽉 차긴 했지만 결혼도 아직 안했는데 아무리 연기라고 해도 주저되더라고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그 부분만 빼면 연기자로 욕심이 나는데요. 그래서 잠시 고민하고 촬영을 시작했는데 나중에 딸로 (같은 30대인) 박진희 씨가 캐스팅됐다는 소식을 듣고 머리에 흰칠을 해야하나 다시 고민이 되더군요.”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스토리와 연기력이 커버했다. 초반에는 `너무 엄마가 젊다`는 지적이 나왔지만 스피디하고 흥미롭게 전개되는 스토리 속에서 그를 비롯한 배우들의 꽉찬 연기력이 배우들의 실제 나이를 잊게 만들었다.

김서형은 선이 날카로운 서구적인 마스크 때문에 줄곧 강한 역을 맡아왔다. 그리고 지난해 5월 막을 내린 SBS TV 일일극 `아내의 유혹`의 신애리는 그 정점에 위치한다. 극악무도한 `악녀`의 화신인 신애리를 맡아 그는 매회 고함을 지르고 목에 핏대를 올리며 눈에서 불을 뿜어내는 힘겨운 연기를 펼쳐야했다. `막장 드라마`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이 드라마의 시청률이 고공행진한 데는 그의 공이 컸다.

“신애리를 7개월간 연기하고 나니 몸과 마음이 너무 지쳤어요. 그리고 바로 부친상을 당해서 어떠한 생각을 할 사이도 없이 시간이 훌쩍 흘러갔어요.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나서는 방송 관계자들에게 상처를 좀 받았습니다. 신애리가 너무 강했기 때문에 차기작을 하려면 더 시간을 가져야하지 않겠느냐는 거였어요. 배우가 연기를 했을 뿐이고, 그저 주어진 역할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돌아오는 것은 이것뿐인가 싶더라고요.”

그는 “외모 때문인지 내겐 늘 어려운 역이 들어온다. 신애리도 실제의 내 성격과는 너무나 다른 역이라 정말 힘들었고 그래서 촬영 당시 많이 예민했다”며 “실제의 난 천상 여자다. 내성적이고 소심하기까지 한데 강한 역만 하라고 하니 속상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그는 신애리에 이어 유경옥도 믿음직하게 소화해내고 있다. 경력 16년의 내공이 차곡차곡 쌓인 덕분이리라.

“1994년 KBS 공채 탤런트로 출발했지만 제 스스로는 진짜 연기를 시작한 시점을 2003년 영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부터로 봐요. 이제 겨우 7년 정도 된 셈이죠. 아직도 연기에 대해서는 뭐라고 얘기못할 정도로 부족하지만 그래도 지난 7년간은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한 것 같아요. 요즘은 유경옥을 보시며 선배들이 `연기는 좀 하네`라고 말씀해주셔서 뿌듯해요. 앞으로도 `김서형을 쓰면 불안한 것은 없어`라는 소리만 들으면 좋겠어요.”

그는 신애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유경옥을 선택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유경옥 덕분에 신애리의 이미지가 희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애리에 이어 유경옥을 연기하느라 힘들지만 배우로서 짜릿합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