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종시인
달밝은 가을이 되어 그런겔까? 국교시절의 친구들이 가끔 생각난다. 둥근 달, 자궁 같은 가을달을 보면 원초적인 인생의 고향, 어린날이 생각난다. 나는 당시 신설학교 점촌국민학교의 2회 졸업생이었는데 휴전 이듬해인 1954년 3월15일에 졸업식이 있었고 남생도 45명, 여생도 18명으로 졸업생이 고작 63명밖에 되지 않았다.

동기생 중 고향인 점촌동에 사는 사람은 지금 10명도 채 되지 않는다. 세상을 등진 학우들도 20명 전후다. 모교 교문을 떠난지 56년이 넘었으니 살아있는 동기생중엔 지금 만나도 서로 얼굴도 몰라볼 경우도 많으리라.

세상에 핵보다 더 무서운 것은 세월이다. 국민학교 동기들의 특징은 구제불능의 저능아(?)도 5% 정도 있지만, 동기중 20%는 어디에가도 충분히 우등생이 되고 남을 우수아가 넘쳐났다. 그래서 엔간해서는 두각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았다. 졸업식날 우등상을 받은 아동은 6명으로 남자 5명, 여자 1명이었다.

우등상을 받은 아동은 한 명도 빠짐없이 지역명문학교 문경중학교에 합격, 중학생이 되었다. 여자 우등생 김상분은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서울 정신여자중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어 다시는 삼삼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너무 집안이 가난하여 머리가 뛰어났던 친구들도 대학진학은 엄두도 못내고 평범한 일터에서 직장생활을 끝내고 노년을 맞았다.

유일한 여자우등생이었던 김상분은 서울시내 명문 여중고를 마치고 이화여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연세대 석사출신과 결혼한뒤 남편과 같이 미국으로 떠났는데 부군은 미국 테네시 주립대학 교수로 퇴임하고 지금은 서울 소재 모 사이버 대학교 총장으로 보람있는 한국 생활을 하고 있다.

김상분은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 연예계나 성악가로 진출했으면 현재 대한민국 예술계의 판도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여자는 남편과 계급이 같다고 했으니 김상분 동문도 총장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겠지만 남편을 총장으로 만든 훌륭한 총장 사모님이다.

지금 생존해 있는 점촌국교 2회 졸업생 40여명이 모두 모여 김상분 동문의 구성진 목소리로 부르는 명곡 `여수`를 다시 들을 수 있다면 늘그막 최대의 쾌거가 될 것 같다.

우등생이던 서경수씨도 최광부씨도 고인이 되고 이춘식씨, 이희주씨도 서울대 출신이지만 사회적응력이 신통(?)찮아 제값을 발휘하지 못해 안타깝다.

점촌국민학교와 문경중학교 동기인 박윤소 회장은 점촌초등 2회 남자졸업생 중 가장 성공한 친구다. 박윤소 회장은 가스통과 선박화재 소방기구를 개발하여 세계시장을 석권하는 주식회사 N.K의 회장님으로 몇년전 연 매출액이 1천억원이 넘었다.

지금은 더욱 사업이 번창하여 매출액도 더 많이 늘었을 것이다. 대재벌회상의 부장자리를 박차고 나와 스스로 창업하여 크게 성공했으니 기획력과 뚝심이 대단하다. 박윤소 회장은 달마다 일정금액을 장학금으로 내게 보내주고 나는 장학금을 도움이 꼭 필요한 대학생에게 전달하여 그 수혜학생이 자립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경쟁이 치열한 21세기의 세계시장에 살아남기 위해 지금 박윤소 회장님은 밤잠도 편히 못자고 아이디어를 계발하는 꿈을 꾼다고 한다. 보통농민의 아들로서 자수성가로 기업을 이룩한 박윤소 회장이 나와 초·중 동기라니 나도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착각이 든다. 근래 우리나라엔 부자를 무조건 미워하는 좋지 않은 풍조가 있다. 박윤소 회장의 경우 5백명이 넘는 공장 종업원과 그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밤낮없이 노심초사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박윤소 회장 같은 기업인이 있기에 많은 국민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다. 필자가 1953년 보릿고개 때 친구들과 같이 박윤소 학우집을 찾아갔더니 푸짐한 밥상을 차려 주어 오랜만에 허기를 푼 일이 생각난다. `적선지가 필유여경`은 지금도 살아있는 고마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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