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다산 가택 터조차 몰라… 죽림서원 훼손은 사학계 큰 손실

학계에 따르면 유배를 통해 포항시 남구 장기면을 찾은 옛 성현은 조선시대만 해도 10여명은 훌쩍 넘을 것으로 추론된다.

물론 이는 비교적 명확한 사료를 토대로 추론한 사료며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료까지 합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과거 이들이 남긴 건축 유적물은 구한말을 거쳐오며 거의 모두 훼손된 상태다.

포항의 유배문화를 조명한다

① 유배문화의 고장, 장기

② 다산과 우암이 머물던 자리

③ 성현은 가고 빈터만 남아

④ 유배문화촌으로 활용·보존해야

먼저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이 기거하던 가택은 지금은 모두 헐어져 터조차 알아볼 수 없다.

현재 장기초등학교의 운동장으로 변한 그곳은 우암이 심은 은행나무와 지난 2001년 뜻있는 지역인사들이 건립한 `우암 송시열·다산 정약용 사적비`만이 옛 흔적을 가늠케 한다.

특히 우암 학파의 계보를 잇는 죽림서원의 훼손은 지역사회를 떠나 사학계 전체의 손실로 받아들여진다.

1707년(숙종 33년) 시공돼 이듬해 완공된 죽림서원은 처음 우암의 영정을 봉안하며 사우(선조의 신위를 모셔두고 제를 올리는 곳)로 출발했다.

이후 오도전 등 장기향림들과 대구의 구용징·전극화 등이 주축이 돼 우암이 장기를 떠난 지 28년 만에 건조된 서원이다.

우암이 직접 장기 유배생활을 기록한 `적거실기`에 의하면 오도전은 당시 우암에게 직접 학문을 사사받던 사람으로서, 우암이 기거하던 가택의 소유주였다.

이 오도전과 그의 형제들, 황보헌, 이동철 등으로 구성된 장기향림들은 1689년 우암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그의 학풍을 후대에 전수하며 노론계가 전무하던 경북지역에 조그만 노론 인맥을 형성했다.

죽림서원은 1871년, 고종 8년 때 비사액서원(국가로 부터 지원 및 인정을 받지 않은 개인서원)이라고 해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 죽림서원이 있던 장기면 읍내리 부지는 개인 텃밭으로 일궈져 주춧돌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이 밖에도 다산 정약용이 거닐며 140여수의 시를 남겼던 자취, 박팽년 일가가 거주하던 가택 등도 모두 현대식 건물로 개발돼 옛 풍경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옛 성현들이 살았던 시대상은 우암의 `봉산작기`, `적거실기` 등 유배일기와 다산의 시 속에서 남아 후대에 명맥을 전해 온다.

이들 자료는 오도전과 다산이 머물던 가택의 주인, 성선봉 가문에서 보관 중이며, 성현들이 가꾼 연못, 일군 밭 등의 모습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신동우기자 beat082@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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