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정약용 주옥같은 詩 남겨… 송시열 심은 은행나무 자생

포항 남구 장기면에는 성현들의 무수한 발자취가 남아있다. 당대의 석학,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 선생의 흔적은 지금도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지탱해나가는 보루 역할을 하고 있다.

`승정원일기` 숙종 원년 6월19일조에 적힌 경상감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우암 송시열은 1675년 6월10일 기사환국에 연루돼 4년 동안 장기에 위리안치(주위에 가시가 있는 탱자나무를 심고 이 바깥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한 유배형)됐다.

포항의 유배문화를 조명한다

① 유배문화의 고장, 장기

② 다산과 우암이 머물던 자리

③ 성현은 가고 빈터만 남아

④ 유배문화촌으로 활용·보존해야

우암은 당시 동생 시도·시걸·부실과 아들 기태, 손자 주석, 증손자 일원·유원이 함께 내려왔다. 이는 비록 유배자의 몸이지만 가족과 노복을 대동할 정도로 당대 석학으로서 우암의 입지를 반증하는 사료다.

이들은 현재 장기초등학교 부지(장기면 읍내리)에 터를 잡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곳에는 우암이 직접 심은 것으로 알려진 은행나무가 현재까지 자생하고 있다.

우암은 유배 당시 수많은 시를 남겼고, 장기에서 지은 주자대전차의(주자대전에 대한 주석서)와 이정서분류(중국 송나라의 성리학자 정호와 정이 형제의 문집을 모은 책 `이정전서`를 재편집한 서적)는 지금도 한문학상 최고의 명저로 손꼽힌다.

특히 유배처소의 주인이었던 사인 오도전은 4년간 우암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장기현의 훈장이 돼 후학들을 길렀다. 이 후학들은 후일 우암을 모시는 영당을 건립하게 되고, 이 영당이 바로 우암 학파의 `죽림서원`의 모태가 됐다.

목민심서로 유명한 다산 정약용도 1801년 2월27일(순조 1년) 천주교 박해사건으로 장기에 오게 된다. 그의 나이 40세의 일이었다.

비록 220일가량 밖에 머물지 않았지만 과거 우암이 지내던 마을에 살며 다산 역시 `기성잡시 27수`, `장기농가 10장` 등 130여 수에 달하는 주옥같은 시를 창작했다.

또, 장기 백성이 병으로 고통받는 것을 구제하기 위해 `촌병혹치(혹 병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겸손한 이름의 의서도 남겼으나 불행히 황사영 백사사건으로 옥에 갇혔을 때 분실되고 말았다.

다산은 시와 저술활동만이 아니라 실학자답게 백성의 생활에도 밀접히 자신의 학문을 투영했다.

당시 어부들이 칡넝쿨로 그물을 만드는 것을 본 다산이 무명과 명주실로 그물을 만들도록 하고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소나무 삶은 물에 그물을 담갔다가 사용할 것으로 가르쳤다는 사실이 현세의 자료로 전해진다.

/도움= 이상준 향토사학자

/신동우기자 beat082@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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