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 송시열·다산 정약용 귀양 흔적 곳곳에 산재

한양에서 1천리(약 393㎞)길. 포항시 남구 장기면은 외진 지역 특성으로 조선시대 강진(전라남도), 제주도와 함께 주요 유배대상지 중 하나였다. `귀양살이`로 잘 알려진 유배 형벌을 통해 성현들은 고난 속에서 서책을 탐독하고 시문을 짓는 등 유배지에 독특한 문화를 남기기도 했다. 장기 역시 우암 송시열과 다산 정약용 선생처럼 당대의 내로라하는 석학들이 머물던 흔적이 아직 곳곳에 묻어난다. 과거없는 현재가 없듯이 이들 옛 성현들이 머물렀던 발자취를 되짚어보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계승해야 할 문화이자 역사의 숙명이다.

포항의 유배문화를 조명한다

① 유배문화의 고장, 장기

② 다산과 우암이 머물던 자리

③ 성현은 가고 빈터만 남아

④ 유배문화촌으로 활용·보존해야

장기의 유배문화는 조선 초기, 태조 때부터 시작됐다.

당시 판삼사사(종1품·삼사의 으뜸벼슬)를 지낸 설장수는 1392년 정몽주가 살해될 때 그 일파라는 이유로 유배형에 처해져 4년간을 장기에서 지내게 된다.

이후 조선개국공신 홍길민의 아들, 대사헌(종2품·사헌부 수장·현 검찰총장) 홍여방도 세종(1420년경) 때 병조의 아전을 불법 책문했다는 이유로 장기와 연을 맺었다.

세조 즉위 4개월 만에 벌어진 단종 복위 운동은 당시 형조참판이었던 박팽년의 일가 모두를 장기현으로 내몰았다.

박팽년의 아버지, 형조판서 박중림과 팽년·인년·기년·대년 등 직계가족들은 죽임을 당하고, 팽년의 조카 용이와 사평 등부터 4촌 여형제들까지 모두 장기현의 관노가 됐다.

이들은 후일 세조의 명에 따라 관노는 면하지만, 중종반정 전까지 장기에서 평민으로 생활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1500년 연산군 때 대사간 양희지는 무오사화에 연루된 이들을 구하려다 미움을 사 2년간 장기에 머물렀으며, 영의정 김수홍은 장희빈의 아들(후에 경종)을 원자로 책봉하는 문제(기사환국)로 반대파에 섰다가 1689년(숙종 15년) 장기에 유배돼 이듬해 10월 장기에서 숨을 거뒀다.

후일 경종 1년(1721년) 신임사화(왕위계승문제를 놓고 노론과 소론이 벌인 당쟁)가 발생하면서 노론 측의 판서 신사철도 장기로 유배, 1724년 영조가 즉위할 때까지 머물게 된다.

/신동우기자 beat082@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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