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안네의 마로니에
(53) 안네의 마로니에
  • 슈퍼관리자
  • 등록일 2010.09.06 21:58
  • 게재일 2010.09.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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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의 일기에 나오는 나무가 부러졌다. 폭풍우 지난 뒤였다. `안네의 일기`(문학사상사, 1995)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학작품 중 하나이다. 그러다 보니 안네에 관한 소식이라면 작은 것 하나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외신이 전송한 사진을 들여다본다. 밑둥치에서 일 미터 정도에서 부러진 나무는 허연 속살을 그대로 드러낸 채 널브러져 있다. 150년이나 된 아름드리나무였다. 안네가 은신처 뒤뜰을 내려다보며 자연의 소중함과 행복한 미래를 얘기하던 그 나무였다.

사실 이번 폭풍우가 아니더라도 머지않아 쓰러질 나무였다. 곰팡이와 이끼로 이미 몸통의 절반이 썩어가고 있었다. 쓰러질 경우 주변 건물을 덮칠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경고에 베어질 운명에 처했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와 안네 프랑크를 상징하는 산 증거라며 주민들이 반발해 법정 공방 끝에 살아남은 터였다. 관리 받은 나무는 앞으로 평균 십 년은 버틸 것이라 했다. 하지만 철제버팀목, 영양제 등으로 보호 받은 지 2년 만에 강풍에 쓰러지고 말았다.

매체들은 하나같이 이 나무를 밤나무로 보도했다. 밤나무가 암스테르담에서는 가로수로 쓰이기도 하는구나,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그 나무는 마로니에였다. 마로니에의 영어명이 horse chestnut이다 보니 번역(중역) 과정에서 실수가 있은 것 같았다. 혹시나 싶어 빛바랜 안네의 일기를 찾아 책꽂이를 뒤졌다. 내 책엔 분명 마로니에로 나와 있다. 은신처의 유일한 또래 이성인, 사랑하는 페터와 창가에 앉아 안네는 바깥 풍광을 감상한다.

`그 때부터 우리 둘은 파란 하늘과 잎이 떨어진 뒤뜰의 마로니에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가지와 가지 사이에는 빗방울이 반짝이고, 하늘을 나는 갈매기와 그 밖의 새들이 햇살을 받아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모든 게 생기 있게 약동하며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어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우리는 잠시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271쪽)

페터가 장작을 패러 나갈 때까지 그 둘은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바깥 파노라마를 맘껏 즐긴다. 무심결에라도 입을 열어 이 한때의 설레는 마법을 깨뜨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 둘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바깥 풍경과 만나 그 충만한 감정이 절정에 이른다. 이 순간, 페터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안네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소중한 자연이 배경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은신처의 안네는 가끔 열린 창을 통해 바깥 세계와 소통했다. 암스테르담 시가 너머 아득한 지붕의 물결, 멀리 보이는 수평선 등을 볼 수 있는 한 결코 불행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뇌에 가장 좋은 묘약은 밖에 나가는 것이고, 자연이야말로 그 위안이라고 적고 있다.

안네의 일기는 무삭제 완전 판을 읽어야 제격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여타 안네의 일기가 모두 덜 된 밥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안네의 일기를 처음 출간할 당시, 안네 아버지와 출판사에 의해 일정 부분 왜곡되고 삭제되었다. 은신처 사람들 중 유일한 생존자인 아버지로서는 안네의 사생활, 가족의 애증, 이웃과의 갈등 등이 노출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다 보니 유대인 대학살의 만행과 그 희생자로서의 안네만 부각되었다.

하지만 원래 안네의 일기에는 그 이상이 담겨있다. 폐쇄된 공간 속에서 십대 소녀가 겪어야 했던 희로애락의 구체적 화법이 빼어난 감수성에 의해 점점이 묻어나온다. 인간의 오욕과 자연의 위대함을 성찰했던 것이다. 은신처의 생활이 절망적이고 구차할수록 안네는 창밖 풍광 너머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 희망이란 물결이 암스테르담 지붕들과 먼 수평선과 햇살에 나부끼는 뒤뜰의 마로니에로 나타났다. 구름 낀 우울의 날들, 비록 태풍에 허리 잘리는 운명을 맞이하더라도 내 안의 마로니에 한그루를 심어보는 건 순전히 안네 덕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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