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종시인
올 여름은 국민들과 가까웠던 화제의 인물 여러명이 이 세상에 미련없이 은퇴공연을 했다. 백남봉(박두식)은 6·25 전쟁고아 출신으로 원맨쇼의 달인이요, 주정뱅이 흉내 연기는 천하일품이었다.

전북 진안고아원에서 보육교사였던 전덕기 여류시인조차 백남봉을 지척(서울)에 두고 모르고 지냈다. 왕년의 평범한 고아원생이 그렇게 튀는 인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단다. 코미디언 백남봉달인을 같은 실내에서 가까이 볼 수 있었던 것은 2002년 10월, 전통도예의 최고달인 백산 김정옥 사기장의 진갑 축하연 자리였다. 나는 백산 선생을 기리는 축사를 읽었고 백남봉씨도 내 시낭독을 경청했다. 재치있는 사회, 게임진행을 보고 코미디의 국수(國手) 백남봉을 감명깊게 응시 주목했다. 그 뒤에도 백남봉씨와 우연히 몇 차례 만날 수 있었다.

백남봉씨의 뒤를 이어 거의 한달도 못되는 간격으로 세계 의상계의 최고봉 앙드레 김(김봉남) 선생이 75세로 백남봉씨보다 연세가 세 살 위다. 한국의 고유미에다 국제적 감각을 살려 앙드레 김은 의상을 통해 세계속에서 한국을 우뚝하게 세웠다. 흰눈같이 청결하고 이팝나무꽃같이 순수한 흰색을 앙드레 김은 복식예술의 주제로 추구하며 살았다. 띄엄띄엄 말을 이어가지만 그분의 말씀도 순결한 배의의 연속이었다. 소재계발에 굶주린(?) 코미디언들이 앙드레 김 선생의 성대묘사로 짭짤한 재미를 쏠쏠하게 보았다. 꼬박 꼬박 세금을 잘 내고 불우한 이웃들에게 세심하게 마음을 쓴 앙드레 김 선생은 그분의 `백색복식` 못잖게 생활도 깨끗하다. 그 분은 생전에 문화훈장 화관훈장(5등급), 보관훈장(3등급)을 받았고 돌아가시고 나서 금관훈장(1등급)을 추서받았다.

한국인으로 문화훈장을 3개나 받은 사람은 앙드레 김 선생 밖에 없다. 특유의 하얀 복장을 차리고 조용히 걷는 모습을 보면 돌지난 아이가 때묻지 않은 동안(童顔)을 보이는 것 같아 신선하게 느껴진다. 앙드레 김 선생은 겨레의 가슴에 길이 남는 복된 분이 틀림없이 되리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오늘 아침신문(8월27일)에는 고 천상병 시인의 부인이던 목순옥 여사가 75세로, 먼저 귀천한 부군 천상병 시인을 만나러 갔다. 목순옥 여사는 경북 상주여고를 졸업한 이 고장 출신이다. 신문기자던 오빠기 천상병 시인을 집으로 데려와 목 여사는 고2때 천 시인을 처음 만났고 졸업한 후에는 야인 관계가 지속됐다고 한다. 내가 목순옥 여사를 처음 뵌 것은 내가 주관하던 도천문학상을 랑승만 시인에게 주게 됐는데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귀천`다방에서 상패와 상품(도자기)을 전해드렸다. 그 때 나는 모과차 네 잔을 주문하여 목 여사님께도 한 잔 대접했다. 그 때 수상자 랑승만 시인은 내게 “김형, 다음 수상자로 천상병 시인을 한 번 드립시다”고 고맙게 조언을 했지만 쇼맨십이 결핍된 나는 고견(高見)을 경청하지 못한 것을 지금도 가끔 후회한다. 익히 아는대로 천상병 시인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4학년 때 `문학예술`에 시인으로 추천완료가 되어 시인이 최고라며 졸업 몇 달을 앞두고 서울대학을 자퇴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천상병 시인의 괴기(?)는 이미 이 때부터 발동되었다.

사실 천상병은 성적우수자(과 10%이내)로 졸업만 하면 한국은행에 특채로 입행이 내정된 상태였다. 조금만 신중하게 처신했다면 천상병 시인의 팔자도 꽤 괜찮았을 게고 목순옥 여사와도 맺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목순옥 여사는 천상병 시인에게 어머니 같은 아내요, 천상병 시인의 예술적 후견인으로 천상병이 지상소풍을 마칠때까지 가장 밀도높은 동반자가 되었다. 목순옥 여사의 수필집 `날개 잃은 새의 짝이 되어`는 내가 여태껏 읽은 수필집 중 두번째로 감명이 깊은 명작이었다. 가장 감명이 깊었던 수필집은 노산 이은상 선생이 동생 이정상씨를 잃고 하룻밤새에 쓴 `무상`수필집이다.

목순옥 여사는 세상소풍을 끝내고 “문디 가시나야, 인제 오나”하는 퉁명스런 천상병 시인과 영계의 재회가 있으리라.

올 여름도 예고 없이 `착한 이웃 세 사람`을 보낸 아쉬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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