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을 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책을 챙긴다. 약속 시간보다 내가 이르게 도착하거나, 늦는 상대방을 기다려야 할 때 책보다 나은 친구는 없다.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문학동네, 2006) 은 그런 경우를 대비해 읽기 좋은 책이다. 중편 정도 되는 분량이라 잠깐 시간을 달래야 하는 경우 안성맞춤이다.

오늘도 약속 시간에 도착해보니 삼십분이나 남았다. 내심 즐거웠다. 언제부터 읽어야지, 읽어야지 결심만 하면서 미뤄둔 책을 집어 든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책에서 말하는 에르노식 감정을 20대 이후로는 잃어버렸다. 따라서 그녀의 `단순한 열정`이 격정적인 사랑 이야기로 읽히지만은 않는다.

집착이자 욕망, 무모함이자 감정 낭비로 비칠 뿐이다. 육체와 영혼의 주체적 건강함이 전제될 때 온전한 사랑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자전적 소설의 주인공이자 내레이터인 아니 에르노는 스스로를 속박한 채, 한 남자의 그 무엇, 혹은 모든 것을 갈망하기만 한다. 사랑하는 대상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왼 종일 기다린다는 것은 내게 코미디로 보인다. 철든 이후 나는 이런 식의 사랑이야말로 가장 배제되어야 할 남녀 간의 방식이라고 믿게 되었다. 아무래도 사랑에 대한 내 열정이 식어버린 모양이다.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처음에는 `문지방을 넘는 그 사람의 발소리`에도 예민해지고, `친구들과의 식사마저 짜증스러`울 정도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하지만 에르노처럼은 아니다. 그녀의 연륜을 보아도, 상대가 유부남이었다는 것을 상기해볼 때도 과도한 감정낭비처럼 보인다.

나이가 많고 적음, 배우자가 있고 없음 따위에 잣대를 들이대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세파를 견뎌온 내공만큼이나 사랑의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집착도 없이, 무모함도 없이, 그렇게 욕망의 부피를 스스로 제어하는 자기주도적 사랑. 적어도 제 영혼을 갉아 먹지 않을 만큼의 자기 확신이 있을 때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는, 역설적 시각으로 책을 읽게 된다.

청춘의 열정이 사라진 탓인지 몰라도 영혼이 피폐해지도록 광적인 집착을 하는 사랑이라면 사양하고 싶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병적 징후일 뿐이다. 책을 읽는 동안 아니 에르노가 친구라면 말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편지질을 하거나, 처음 보는 괴상한 망토를 걸치고 애인을 기다리기 위해 현관 앞을 서성거리는 것은 한 번 정도로 족하지 않을까. 사랑이란 급물살의 소용돌이에 허우적대고, 모든 에너지와 감정을 쏟아 부은 채 일상의 질서조차 조절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건 아니 에르노 한 사람만으로도 족하다.

소설이란 상표를 단 자기합리화의 덫에 빠진 한 작가의 보고서 정도로 읽힌다. 아무래도 나는 집착하지 말라, 기다리지 말라, 다만 상황을 즐겨라, 그런 다소 쿨한 사랑의 보고서를 기대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자책에 시달리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가 그런 생각을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에르노식 소설을 읽기엔 내 감정이 너무 메말랐나? 일본 사소설류를 접할 때(정말이지 에쿠니 가오리나, 요시모토 바나나 등은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느끼는 거부감이랄까.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이라고 선언할 때 이런 책이 보편타당성을 인정받거나, 혹은 이런 책에 대한 독자층이 늘어나는 것에 대한 경고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의 선언이 거시적, 역사적, 사회적 역할로서의 문학에 대한 종언이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의 문학(미시적, 개별적, 개인적인 역할로서의 문학)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후자도 문학적 개연성을 충분히 갖고 태생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래도 `단순한 열정`류에는 내 너그러움이 동하지 않으니 어찌하면 좋을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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