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종시인
이틀 전 밤 꿈에 잠깐 어머님이 나타나셨다. 어머니를 여읜 지 벌써 9년이 넘었지만 꿈에 나마 뵐 수 있는 것이 한 해 한 번 정도가 될까 말까다.

그저께 밤에 어머니 꿈을 꾸고 나서 그전에 생각해 두었던 `어머니 생각`을 집필하게 되었다. 올해는 6·25 60돌이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늦가을에 읽었던 월간잡지 `소년세계` 11월호에 실렸던 동시 `어머니 생각`(송구화 지음)을 읽은 지 58돌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잠깐 눈앞을 스쳐간 동시 `어머니 생각`이 너무 좋아 40년 세월을 두고 월간 `소년세계` 게재본을 찾았지만 그 책은 이 땅 어디에도 없었다. 심지어 국립중앙도서관-한국의 중심 국립도서관의 잡지코너를 샅샅이 뒤져봤지만 내가 찾던 `소년세계`는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소년잡지와 학생잡지를 주름잡던 생전의 유경환 시인에게 동시내용과 `소년세계` 이름을 밝혔지만 한사코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문학세미나를 빠뜨리지 않고 참석하면서 특히 나이가 걸맞은 아동문학가에게 이야기를 해봐도 금시초문이란 대답이 고작이었다.

나는 어떤 다른 사람 보다 집념이 드세고 추구력이 대단하다고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다.

`월간문학`책 머리에 원로 문인들의 이야기가 2003년경에도 달마다 소개가 되었는데 아동문학가 어효선 선생님을 취재해 놨다.

어효선 선생님은 동요 `꽃밭에서`와 `과꽃`으로 친숙하고 수필 `유지신사(有志腎死)`가 매력적인 내겐 친숙한 선배문인이라서 꽤 여러장이 되는 취재기사를 빠뜨리지 않고 읽었는데 내 눈앞에 벼락보다 더 큰 화끈한 불덩어리가 다가왔다. 40년을 두고 추적하던 수수께끼가 풀릴 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6·25 전쟁 무렵 어효선 선생님은 아동잡지 편집인을 하셨고 그 때 모아둔 아동잡지를 춘천교육대학 도서관에 전부 기증하셨다는 기사를 읽었다. 망설일 것 없이 당장 어효선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 궁금증을 그것도 40년이나 묵은 궁금증을 말끔하게 풀게 되었다.

어효선 선생님은 내 전화를 받고 대가(大家)답게 반가워 하시며 춘천교육대학도서관에서 아동잡지를 관리하는 담당 문인규 사서님을 소개해 주셨다.

잡지 이름은 `소년세계`며 1952년 10월 아니면 틀림없이 11월이라 귀띰을 드렸더니 `소년세계` 11월호(1952년)에 내가 찾던 작품이 실려 있음이 확인됐다.

문인규 사서님께서는 동시 `어머니 생각`을 복사하며 팩스로 보내주셨다.

40년이나 오매불망 찾던 동시작품을 손에 들고 보니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해도 이보다 더 기쁠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 생각`

“누나따라 시골길 피난을 갈때/고향에 혼자 남은 어머니 생각”(이하 줄임, 대구 피난 덕신 국민학교 6학년 송구화)

불과 두 줄의 짧은 동시지만 6·25때 피난하던 모습이 너무 생생하게 떠오른 `어머니 생각`을 지은 송구화 어린이는 비록 같은 학교는 아니지만 나보다 한 학년 위인 6학년 아동이었다.

천재문학가가 되었으리라는 나의 상상과는 달리 송구화 어린이는 평생 글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나는 국민학교 5학년때 감명깊게 읽었던 동시를 40년도 더 되어 다시 만나게 된 게 너무 반가워 노래로 흥얼거렸더니 옆에서 듣던 맏아들이 채보를 해주어 난데없이 나는 작곡가로 데뷔(?)하게 됐다.

다시는 맹세코 시를 노래로 읊조리지 않겠다. `어머니 생각`은 나의 일생일작(一生日作)이다. `일생일작`이라지만 어떤 이들은 명곡(名曲)이라 하니 소발로 쥐잡은 격이라 할까. 늙으나 젊으나 우리 인생에게 어머니는 영원한 명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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