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종시인
철도사고로 어려서 두 다리를 잃은 20세 청년이 대구역에 살고 있었다. 기차 바퀴에 깔려 무릎만 남고 두 다리가 달아났으면 기차역 쪽은 눈으로 보기도 안쓰러울텐데 기차역 부근을 맴돌며 구걸을 하고 살았다.

지금부터 꼭 44년의 세월이 흘러간 지난일이지만 바로 어제 목격한 일인듯 그 때 목격한 뒷골목의 풍경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다.

대구역 앞에는 부모없는 거지 아이들이 떼를 지어 역 대합실을 근거지로 살면서 구걸을 했다.

두 다리가 없는 청년의 키는 여섯살 정도 아이의 키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조카 같은 여덟살 먹은 거지아이의 발길에 차여 다리없는 20세 청년이 서럽게 울고 있었다. 열 두살이나 어린 8세 아이에게 얻어 맞다니 억울하고 분했을게다. 다리가 없어 무릎으로 기다보니 공격할 힘이 전혀 없고 기동력이 없어 어린 놈에게 사정없이 얻어 맞고 있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한데서 제멋대로 자란 거리의 아이들에게 사랑은 약에 쓸려 해도 없다.

하층사회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도 사랑할 줄 모르고 싸움과 폭력의 비정이 그들의 살아가는 방법이다.

거지 세계 뿐 아니라 사회생활에도 그렇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돈이 없고 지위가 낮으면 나이에 걸맞은 예우를 받지 못한다.

나는 유복자로 태어난 운명덕분(?)에 청소년 시절이 순탄하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바쁘게 그동안 지은 빚 때문에 8년간 곁방살이를 했다.

역경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분발해 지역중심 공립중학교의 교사가 되어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때 내가 골목길을 지나가니까 너댓명의 나의 초·중학교 4년 후배 녀석(?)들이 나를 두고 “김시종이 제가 우쭐(?)대도 몇년전에 X네 골방에 곁방살이하던 놈”이라고 수군댔다. 사실 그랬다.

오두막일망정 내집이 있어야 기 안 죽고 살 수 있다. 내 집이 없이 8년이란 긴 세월을 싸구려 곁방살이를 했기에 내 집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고마움을 느끼며 산다.

못살다 보니 깔보는 이들도 의외로 많았지만 제대로 인정을 받으며 구김살없이 살기 위해 청년시절에도 여자와 사랑을 하지 않고 끈질기게 책과 사랑을 했다. 못 살고 고생한 것은 내가 복이 없는 팔자를 타고 났기 때문이지 부자 탓이나 사회의 부조리 때문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나의 경제적 현주소는 잘 사는 축도 아니고 극빈자도 아니고 중하위에 속한다. 내 인생의 목표를 부(富)에 두지 않고 새로운 미(美)의 창조를 염두에 두고 살아가기 때문에 나름대로 삶의 보람을 만끽하고 있다. 재산이 수백억이 되는, 나보다 4년 밑의 후학이 있지만 그의 푸짐한 재산도 `얇은 내 시집`에 못 미친다고 자부하고 있다.

남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절절한 시(詩)야말로 내가 가장 아끼는 내 재산목록 1호다.

나는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겨달라는 주문을 안한다.

자기 인생을 바르게 밝게 살면서 이 사회가 건강하도록 붓끝으로 지키는 열정의 사람임을 기억해주면 더없이 고맙겠다.

지난 2001년 1월, 어머니를 여읜 필자는 충격으로 마음에 공황이 와서 몇년 동안 산문은 한 편도 쓸 수 없었지만 다행히 시심(詩心)은 마르지 않아 명시(明詩)(?) 수준의 사모곡(思母曲)을 수십 편 지었다.

어머니는 나의 부모면서, 인생의 믿음직한 동지(同志)가 되셨다.

어머니는 생전에 아들의 홍보실장이 되어 주셨다. 잘 나지도 못한 아들 자랑으로, 날이 새고 날이 저물었다. 어머니 덕분에 필자는 돌연 만고효자(?)로 이웃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됐다. 지금도 돌아가신 어머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내가 세상 살아가면서, 제일 기뻤던 것은 곁방살이 8년 끝에 우리 집을 산 것이란다”란 말씀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내집을 회복한 것은 광복(光復)의 기쁨보다 더 한 것이었다.

일흔을 바라보는 내 나이값을 제대로 받고 있는지 가끔 마음속으로 점검을 해본다.

세월이 벌써 44년이나 흘렀지만 두 다리가 없던 당시 20세의 청년이 지금 살아있다면 64세가 되었을텐테, 어떤 환경에서 어떤 모습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지 불현듯이 생각난다. 사람은 나이에 관계없이 제 키만큼 대접을 받는 냉혹한 세상임을 다시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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