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꽃이 진다. 떨어진 꽃잎들 켜켜이 익어간다.

순결하고 고고한 생의 끝자락에서 만나는 저 상처의 무덤. 오점 하나 없이, 소리 소문 없이 깨끗한 생을 마감할 것 같은 붉은 꽃들도 결국은 흉물스런 흔적을 남긴다. 꽃 떨어진 골목을 지나칠 때면 영화 매그놀리아가 떠오른다.

매그놀리아(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 2000)는 목련꽃을 말한다. 하지만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세상의 모든 상처 입은 꽃을 뜻하리라.

포스터 속 활짝 핀 꽃은 자세히 보면 누렇게 타들어 가고 있다.

수많은 주인공들은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로즈니, 릴리니 하는 꽃 이름을 가진 등장인물이 많은 것도 이 상처의 키워드와 무관하지 않다.

아무리 화려하고 향기로운 꽃도 지고 나면 흉물스런 상처를 남긴다. 생의 이면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곧 상처의 길을 보듬는 것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그렇다면 상처의 고향은 어디인가? 아이러니하게도 내게는 그것이 우연이라는 메시지로 와 닿는다.

우리가 주고받는 상처의 대부분은 필연이 예견된 우연으로 생긴다. 생명력이 소진된 꽃은 어디선가 불어온 돌개바람에, 계절을 재촉하는 단비에 맞춤하게 떨어진다.

꽃이 지는 게 우주의 섭리라면 돌개바람과 단비는 상처를 가져올 우연이다. 필연으로 직조된 우주의 부산물인 그 상처는 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보듬어야 할 노력이다. 그

런 눈으로 보면 꽃 지는 건 더 이상 서러움도 추함도 아니다. 본시 아름다움과 추함 둘 다 자연의 실체이다.

우리 일상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꽃 핀 나무든, 꽃 진 무덤이든 있는 그대로를 볼 줄 아는 눈을 키워 가는 것. 조금만 예민한 자라면 꽃 핀 나무만을 보고 감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꽃이 진 자리, 즉 생의 이면까지를 꿰뚫어 보는 눈이 없는 일상은 공허하다.

꽃이 진 땅까지 무심하게 내려다 볼 줄 아는 마음의 눈을 키우는 자세가 필요하다.

누군가 소개해준 글에서 `모든 진실은 부뚜막에서 죽는다`라는 말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우리가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대부분은 가공된 것이란다.

부뚜막 도마 위에서 토막 나고, 절여지고, 튀겨진 채로 밥상에 오르기 십상이란다. 진정한 삶의 태도는 이런 가공된 상태를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을 키우는 것이란다.

도마에 오르기 전 비리고, 꿈틀대고, 때론 썩어가는 이 모든 날것의 실체를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상처를 제대로 이해하고 보듬게 된다.

비단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더라도 살다보면 사물이나 사람을 그릇 이해하고, 작은 오해로 타인을 궁지로 몰아넣기도 하는 게 인생이다. 솔잎처럼 작고 뾰족한 우연들이 모여 상처가 된다. 그 상처가 풍화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것을 견디기 위해 술을 마시고, 눈물을 흘리고, 더러 글을 쓸 것이다.

T.S 엘리엇이 말했다는 `좋은 작품은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라는 말은 적어도 내게 유효하다. 이해의 시간을 거치지 않고 바로 전달될 수 있는 소통이야말로 날 것의 실체일 것이므로. 예를 들면 인간 내면에 감춰진 폭력성을 고발하는 것도 좋은 날것의 재료이다.

도처에 자리 잡은, 위선으로 충만한 인간의 폭력성 또한 상처를 낳는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상처는 떨어진 꽃을 볼 때처럼 사유의 확장을 보장할 테니. <소설가>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