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프롤로그
경북동해안지역의 소국 
일본속에 숨쉬는 역사적 진실
`신화의 고향` 이즈모의 유적들
문화전파의 바닷길 있었나
에필로그

연오랑 세오녀가 일본으로 건너갔다면, 일본 어느 곳에 정착하였을까?

이 화두를 풀기 위해서는 일본에 있는 신라계 신사들의 내력을 빼놓을 수가 없다.

포항과 마주 보는 시마네현 이즈모는 일본 신화의 고장이다. `신들의 고향`으로 알려진 이즈모에는 연오랑 세오녀와 관계있는 신화가 있을까.

이즈모는 매우 오래전부터 일본에서 문명이 시작된 곳이며 다른 곳과도 문명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른 시기부터 문명이 시작되고 문명 집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그와 관련되는 유적과 유물이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일본의 신석기인 조몬 시대, 또 기원전 3세기경인 야요이 시대의 유적도 많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1984년에는 벼농사의 곡창이라는 이즈모 평야를 내려다보는 고진다니유적에서 3백58개의 동검과 동탁(구리 종) 6개, 동모 16개, 무기류, 동경, 곡옥 등이 무더기로 출토되어 일본을 놀라게 하였다. 이는 한반도에서의 철기문화 전파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게 해주고 있으며 야요이 시대 이즈모 지역에 철기를 제작 할 수 있는 문명집단이 있었음을 실제로 알려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즈모에서 연오랑 세오녀의 행적을 알아볼 수 있는 관련 있는 유적을 찾는다면 당연히 이즈모에 있는 진한계나 신라계의 신사, 일본 속에 살아 숨 쉬는 역사적 진실을 간직한 신사들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이 일에는 스사노 오노미고토를 신주로 모시는 신사가 매우 중요시된다.

이 중에서 대표가 되는 신사가 `이즈모 타이샤` 이다. 이즈모 타이샤의 옛 이름은 이즈모 야시로, 신중의 신인 우쿠니누시노마코토(大國主神)를 모시는 신사로 이 신은 인연을 맺어주는 신으로 알려져 있어서 연인들이나 배필을 만나기를 기원하는 젊은 층이 많이 찾는다. 이 신사의 위용은 일본에서 대단하다. 최고의 건축물뿐만 아니라 최고의 신으로 불리는 대국주신(大國主神:오쿠니누시노미코토-스사노 오미코토의 후손=아들신 또는 5대신으로 전한다고 함)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는 모두 10만 개가 넘는 신사(神社)가 있는데, 그 많은 신이 음력 10월이면 한곳에 모여 회의를 한다. 그곳이 이즈모 타이샤 이다. 음력 10월이 되면 일본 전역의 신사에 모셔진 그 많은 신들이 이즈모 타이샤에 모여 회의를 열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는 음력 10월은 신이 없는 달로 불린다. 그러나 이즈모에서는 신이 모이는 달인 음력 10월에 `가미아리즈키`를 축하하는 행사가 열린다. 그리고 이즈모 타이샤에서는 신들의 모임을 위하여 본전 옆에는 신들을 맞이할 신들의 회의실(國殿)은 물론, 신들의 숙소도 지어 두고 있다.

바로 이 이즈모 타이샤에는 스사노 오노미고토를 모신 별도의 사당이 있다.

또 이즈모 타이샤에서 서북쪽의 해안을 따라 15km 정도를 가면, 한적한 히노미사키신사(日御神社)가 있고 그 경내 산기슭에는 가라쿠니신사(韓國神社)라고 한자로 씌어진 팻말이 붙어 있는 조그만 사당이 있는데, 신라에서 온 신인 스사노 오노미고토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현지인들은 스사노 오노미고토가 한산(韓山)에서 왔다고 한다는데, 신라에서 배를 타고 건너왔다는 스사노 오노미고토의 신라 이름이 연오랑이었을까.

그리고 이즈모시 당천정(唐川町) 계곡 상류 가파른 산록 신들이 강림할 수 있는 높은 부분에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조그만 가라카마 신사가 있다. 이 신사로 올라가는 들머리 냇가에는 에는 돌배라고 불리는 배(船) 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정말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 세오녀가 타고 갔다는 바위를 상징하고 있을까.

이 외에도 이즈모에는 이파바신사(出雲 伊波比神社·埼玉縣入間郡毛呂町)에도 스사노 오노미고토를 신주로 모시고 있으며 수좌신사(須佐神社)(出雲市佐田町),한국이태저신사(韓國伊太神社)(東出雲町揖屋神社境內)도 관련이 있다고 한다.

한편, 이즈모시와 가까이 있는 마쓰에시 (사쿠사초 227)에 있는 야에가키신사(八重垣神社) 경내에는 신라화가(거세금강)가 그렸다는 신라신 스사노 오노미고토와 그의 아내 구시이나다히메를 그린 야마토 그림풍의 벽화가 있는데 중요문화재(重要文化財)로 지극한 보호를 받고 있다.

이러한 정황은 모두가 하나의 귀결점을 가지는데 신라에서 바다를 건너 사람들이 이주하고 문명이 전파되었다는 것을 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편 “스사노 오노미고토는 하늘나라 고천원(高天原)에서 살다가 신라땅 우두산(牛頭山)으로 내려갔다가 신라땅에서 배를 만들어 바다 건너 일본땅으로 건너왔다”는 것이 `일본서기`의 내용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고천원을 어디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일본에서도 일찍부터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 왔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경남 거창군 가조면이 일본 왕가의 고향이라며 가조면의 우두산(牛頭山)을 스사노가 쫓겨난 소의 머리 곧 `소머리 산`을 우두산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 학계에서도 고천원을 한반도 남부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논리라면 연오랑 세오녀 또한 철기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일본으로 문명을 전하고 일본의 왕과 왕비가 되었으니, 그들의 출발지를 또 다른 고천원(高天原)으로 보는 것도 가능 한 일이 아닐까.

/이즈모시에서 김용우 포항시사편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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