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피곤한 게 인간관계이다. 핸드폰이 수갑이나 족쇄처럼 보이고, 잡은 약속은 무거운 거름더미 지게가 되어 어깨를 짓누르기도 한다. 의도하지 않은 이러한 관계의 피로감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만만찮은 시간과 에너지가 소비된다. 그것이 두려워 될 수 있으면 불필요한 만남을 미루고, 웬만하면 오해의 여지가 있는 소통에는 끼지 않으려 한다.

혼자인 자유는 얼마나 축복받은 것인가. 등받이 깊숙이 몸을 묻고, 배달된 책을 순서 없이 읽거나, 베란다에 나가 풀죽은 로즈마리 화분에 물을 주는 것. 짧지만 짜릿한 쾌감을 보장하는 이런 순간은 사람 사이에서 부딪히는 소소한 상처를 충분히 위무하고도 남는다. 접대용 멘트도 필요 없고, 정돈되고 규격화된 언행으로 스스로를 검열하지 않아도 되니 이보다 더한 기꺼움이 어디 있으랴.

그렇다고 관계없는 일상이 가당키나 한가? `타인이 곧 지옥`이라는 까뮈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타인 없는 일상 또한 지옥이 아니던가. 시게마츠 기요시의 `허수아비의 여름휴가`(양철북, 2006)에 나오는 라이언 선생과 곤타 선생이 그걸 말해준다. 누구에게나 현실은 힘겹고, 일상은 따분하고, 관계는 피로하다. 그건 내 안의 감옥 못지않게 타인의 감옥 또한 작동하기 때문인데 어쩔까나, 그 감옥이야말로 삶의 진정성에 도달하는 과정이란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으면서 과도한 감정이입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모래와 안개의 집` 비디오를 보면서 눈물을 훔쳤고, 뒤이어 `허수아비의 여름휴가`를 읽었는데 눈시울이 붉어졌다. 영화에서는 이란 출신 이민자 베라니 대령의 처연한 죽음 - 밀폐비닐 봉지를 덮어쓰는 자발적 죽음의 방식이 느꺼웠고, 예의 허수아비에서는 제 철 아닌 딸기를 사온 라이언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아내 미치코의 마지막 향연에서 울컥했다. 전자가 타인이 주는 지옥의 극한점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후자는 타인 없는 지옥의 상실감에 대해 말해준다. 라이언 선생 같은 사람에겐 결코 타인이 지옥이 될 수 없다. 아니, 모를 일이다. 타인이 이미 지옥인 것을 일찍이 알아채고 그것을 넘어선, 타인 없는 경지에 이르는 방식을 설파하고 있는지도.

슈지(라이언 선생님) 혹은 가즈(허수아비의 여름휴가)는 타인이 곧 지옥인 전형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그 둘 다 그걸 넘어서, 각자의 대상에게 쏟는 애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돌이켜보건대 얼마나 학생 같지 않은 학생이 스승을 괴롭혀 왔고, 스승 같지 않은 스승이 우리들 곁을 스쳐갔던가. 애초에 그들은 인간적 고뇌조차 귀찮아한 부류였다. 하지만 라이언이나 허수아비 선생 같은 부류는 그 타인의 감옥들을 향해 최선을 다했다. 착한 사람에게 고통이 먼저 오고, 오래 참고 기다리는 사람일수록 더 깊은 회한에 사무치는 게 삶이더라. 그리하여 너무 젊은 나이에 아내의 죽음이 기다리고, 예기치 않은 이른 탈모에 가발을 쓰게 되고, 스트레스로 두피 가려움증을 앓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가발을 벗어던질 수 있는 것도, 라이언 선생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거짓 없는 생일수록 불필요한 고뇌에서 빨리 자유로운 거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지 않은가. 중년의 삶은 이러이러하다고 작가 시게마츠 기요시가 말할 때 나는 쉽게 고개를 끄덕인다. 책에서처럼 제 삼자의 말에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감정의 절제도 배울 때이고, 잡지에 실려 있지 않은 별자리 운세를 만나 광분하기도 하고, 타협과 굴종의 얼굴로 지리멸렬하게 살아있을 것을 주문당하기도 하고, 명퇴에 상처받아 소심한 뒷방 가장이 되어 자식에게조차 놀림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허수아비 신세가 되기도 하는 것이 중년이다.

이 모든 것을 공감 가는 에피소드로 배치한 작가의 시선이 부럽다. 그렇다고 타인은 감옥이다, 라는 명제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아직 더 많은 허수아비를 겪은 뒤에야 나는 천천히 타인의 감옥에서 걸어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라이언 선생처럼 타인 없는 세상이야말로 감옥이라는 진정성에 이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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