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9월30일, 중공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던 김일성 고지에 17연대와 교대, 침투되었다. 행정구역은 강원도 철원군 선운면 우측에 위치한 고지로 좌·우·뒤 3면이 깊은 협곡을 이룬 돌출된 고지로 북쪽 적 방향에 산길 도로가 있으며, 고지 능선일대는 적군 시체 약 7천여수의 해골이 깔려있었다.

교통호를 따리 진지이상 유무를 점검하는데, 시체 썩는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적진지로 연결되는 정면 능선줄기를 수색·관찰하고 수면휴식을 취한 후 DST무전기로 중대장에게 진지배치 완료 보고를 했다.

적의 야간공격 대응책이 떠올라 소대장과 함께 중대장에게 가서 여러 작전에 대해 상의하고 중대 전진지를 두루 살펴보았다.

17:00, 중대 취사반에서 배달된 주먹밥으로 저녁식사를 마치고 각 대원들의 초소·진지 담당구역과 화력을 재점검 했다.

교통호 깊이는 일어서면 목까지 닿고 굴곡이 심하며, 참호는 뚜껑이 허술하다.

그동안 수차례 피아간의 공방전으로 격렬하게 포탄, 폭격을 퍼부은 치열한 격전지인 산 능선이 나무 한그루 없는 벌거숭이 땅으로 변하다보니 참호 위를 대충 가는 나뭇가지로 걸치고 그 위에 마대 쪼가리와 떨어진 우의를 펼친 후 흙을 덮었는데, 부실해서 다시 죽은 적의 시체를 끌어다 올려놓고 다시 흙을 덮었다.

진지 요소요소에 로켓포와 자동화기를 배치하고 전방에는 2~3중 원형철조망 설치, 각종 지뢰를 매설했다.

교통호와 참호 벽에는 뚜껑을 뜯은 수류탄 상자를 7~8개씩 쌓아두었다.

3일이 지나도 적의 공격은 없었으나 교통호 위로 머리를 내밀면 탄환이 날아온다.

비가 오는 날이면 고역이다. 썩은 시체의 송장물이 보초병의 얼굴에 떨어지고 주간에 교대로 취침을 하면 입술로도 흘려들어 독약 맛이다. 참호와 교통호로 출입 할 때 늘어진 시체의 팔과 손가락 등이 철모에 부딪치는 소리가 `딸가닥 딸가닥` 한다.

임무교대한지 7일째 되는 날 24:00가 임박하자 전초지에서 적 발견 상황을 알리는 DST무전기가 울렸다.

우리 중대원들은 진지에서 사력을 다하여 사격을 가한다.

적이 원형철조망으로 다가오자 각종 지뢰가 폭발, 포탄이 작렬하고 각종화기가 불을 뿜어대니 쓰러져 죽어가는 비명소리, 돌격을 독려하는 고함소리에 고막이 울려 찢어질 듯 청각이 마비되어 말은 못하고 손짓으로 대원들에게 신호를 보낸다.

적은 방망이 수류탄을 던지고 따발총을 발사하면서 철조망 주변에 까맣게 깔린 시체를 밟고 넘어 진지로 다가온다.

어느새 교통호로 올라오는 적을 발견한 대원들은 교통호 상단으로 뛰어올라 적을 무차별적으로 찌르고 처부순다.

중기관총 등 자동화기진지로 달려가 보니 쉼 없이 맹렬히 사격한 탓으로 총열이 벌겋게 달아 실탄이 발사되지 않자 부사수가 오줌으로 식히는 장면을 보고 호통 친다. 빨리 본부지휘소의 물통을 가지고 와서 사용하라고 지시하고 고전하는 취약지역으로 달려가서 정신없이 총을 쏘고 수류탄을 투척하니 철조망 주위는 샐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적의 시체가 산더미 같이 쌓였다.

고지를 끝까지 사수하라는 명령에 따라 열흘간 2차례의 치열한 방어전을 치렀으며, 인해전술로 밀어 닥치는 중공군은 반드시 후미에 `독전대`라는 감시병들이 지키고 있어 무단철수·후퇴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하기 때문에 죽는 줄 알면서도 시체를 밟고 전진만 하니 전쟁의 참혹함이 뼈 속 깊이 파고든다.

10월 중순, 타 부대와 진지교대 하고 철원군 광삼 근방으로 이동하여 3일간 휴식했다. 우리 2소대는 중대본부와 약 1.5㎞ 떨어진 동북방 250고지 능선에 주둔했다.

문 소대장은 부상 입은 손 부위가 악화되어 연대 C·P 의무중대로 내려가고 강원도 강릉 출신 김 소위가 소대장으로 부임 받아 중대 대기연락병을 따라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