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경술국치(庚戌國恥) 100주년, 광복 65주년을 맞는다. 하지만 아직도 이 같은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역이 `민족의 섬, 대한민국 땅` 독도다. 러·일전쟁에서 득세한 일본은 독도를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의 거점으로 잡아 1905년 2월 22일에 `시마네현고시 제40호`로 독도를 자국영토로 편입시켰다. 일본은 이어 1910년 8월22일 강박에 의해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해 한반도와 같이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불법적으로 병합시킴으로써 독도는 지금도 완전한 광복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후 1945년 8월15일 일본의`무조건항복선언`을 문서화한 동년 9월2일의 `무조건항복문서`에 의해 독도는 한반도와 같이 일본으로부터 분리됐다. 하지만 올해로 광복 65년이 됐지만 일본은 독도가 자국 땅이며 한국이 무력으로 침범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구나 자신들의 억지주장대로 시마네현고시 40호, 다케시마 편입 100년이 되는 지난 2005년 3월16일, 매년 2월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하고 공식적인 행사를 갖고 있다. 중학 교과서는 물론, 고등학교 교과서와 심지어 판단을 올바르게 할 수 없는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표기, 세뇌교육을 시키고 있다. 따라서 독도는 동해상의 단순한 작은 고도나 영유권분쟁의 씨알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혼이며 애국의 상징으로 과거 일본의 만행과 침략의 역사를 담은 교육의 장이다.

<편집자주>

지증왕 13년 때 신라 영토로

세종실록지리지, `우산`으로 명기

성종 `삼봉도`·숙종 때 `자산도`

고종 때 日 정부에 조업 항의

日, 1905년 자국영토로 편입

1945년 광복 후 일본서 분리

1952년 대통령 `평화선`안에 포함

1953년 독도의용수비대 결성

日, 2005년 `竹島의 날` 지정

韓, 2005년 독도개방·입도 허용

작년말 기준 등재인원 2천여명

■지증왕 13년 독도는 조선 땅 편입

울릉도와 독도가 신라 영토로 편입된 것은 신라 지증왕 13년(512) 때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지증왕 13년 6월 신라 이사부가 울릉도를 정벌, 신라에 귀복시켰고 해마다 토산물을 받았다는 기록이다.

이사부는 내물왕의 4대손으로 성은 김씨다.

그는 지증왕 6년(505년) 실직주(삼척)의 군주가 됐다가 지증왕 13년에는 하슬라주(강릉)의 군주가 돼 우산국을 징벌했다.

고려사에 의하면(1156년, 의종 11년) `동해 가운데 우릉도가 있는데 이곳의 땅이 기름지며 주현을 설치한 때도 있고` 했으며,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독도(우산도)는 울릉도와 더불어 울진현의 동쪽바다 가운데 있고 울릉도에서 그다지 떨어져 있지 않아 바람이 잔잔하고 청명한 날이면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며 우산(山)으로 불렀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성종 때는 독도를 삼봉도(三峯島)로, 숙종 때는 자산도(子山島)라 불렀다. 지난 1693년(숙종 19년) 일본 어부가 독도와 울릉도 근해까지 출현, 어로 활동을 함으로 동래 어부 안용복은 일본으로 건너가 독도가 조선의 고유 영토임을 확인하고 일본 어부들의 울릉도, 독도근해의 어로 활동을 금지토록 했다.

정조 때에는 독도를 가지도(可支島)라 불렀다.

울릉도 주민들은 물개를 가제(可支魚)라고 부르기 때문에 물개가 자주 나타나 독도를 가지도라고 부르기도 했다.

지난 1794년(정조 19년) 한창국의 울릉도 유민보고서에는 `울릉도에서 기자도로 향해 떠났는데 섬 가까이 이르자 네댓 마리의 가제가 놀라 뛰어 오르는 모양이 물소 같았다.

포수가 쏘아 두 마리를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1876년 이후 일본 어민들이 독도와 울릉도 근해에 다시 속출하기 시작하자 1881년(고종 18년)에 엄중 항의,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난 1895년(고종 32년)에는 도장(島長)을 도감(島監)으로 바꾸고 도감에 울릉도 사람 배계주를 임명, 판임관 대우를 했으며 조선시대의 독도는 분명한 지리적 인식의 바탕위에 확실한 지방행정 조직의 관항에 속했다.

■일본과 분쟁

◆일본의 주장=일본은 1618년 오타니(大谷)와 무라까와(村川) 양가(兩家)에 독도의 지배를 허가하는 등 울릉도에 도항을 허가, 약 80년간 경영한 이후, 독도를 1905년 시마네현에 공식 편입 조치함으로써 국제법상 국가 영토취득의 권원인 선점을 완료했고 또한 편입조치 후 독도 실제조사 및 어로면허 발급 등 국제법상 실효적 지배를 행사했다.

이후 1910년 8월22일 한일합방늑약 또는 경술국치로 한국의 모든 정치적 권한이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훼손이 강화됐다.

하지만 한국정부의 노력으로 독도에 대한 권리 행사를 한국이 갖자 지난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의거 전쟁 전의 일본 영토를 일본은 다시 찾았으므로 독도도 당연히 일본에 귀속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2005년 3월16일 독도를 편입한 100주년을 기념해 매년 2월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정했다.

◆한국정부의 대응=1945년 광복과 함께 주권을 되찾은 대한민국은 1947년 한국산악회가 중심이 돼 생물, 지리 등에 관한 학술조사를 실시했고 1952년 이승만 대통령은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을 발표, `평화선`안에 독도를 포함시켰다.

이후 1953년 4월20일 홍순칠 등 33명이 독도 의용 수비대를 결성, 한국전쟁 혼란기를 틈타 일본어부들이 독도에 무단 상륙, 어로 행위하는 것을 물리쳤고 1956년까지 독도를 수비한 후 울릉경찰서에 그 임무를 인계했다.

54년 8월15일 처음으로 독도 등대를 점등하고 세계 각국에 등대 설치 사실을 통보했으며 그해 대한민국 해군 수로국에서 독도를 측량, 원도를 수로국에 보존하고 있다.

61년부터 2년간 국립건설연구소에서 평판 측량을 실시해 축척 1:3천의 지형도를 제작했다.

78년 한국사학회에서<울릉도, 독도 학술조사 연구>를 간행했으며 1981년에는 한국자연 보존협회에서 <울릉도 및 독도 종합 학술조사 보고서>를 발간했으며 80년 5월 건설부 국립지리원에서 항공사진 측량 방법에 의해 1:1천 및 1:5천 대축척 지형도를 제작했다.

2005년 독도를 개방했으며 국민들의 관심이 뜨겁자 2009년 1회 470명(1일 제한 없음)으로 확대했다.

독도개방 후 방문객도 급증해 2009년 현재 출항횟수 542회, 관람인원 13만5천376명, 입도횟수 443회, 입도인원 10만8천284명 등을 기록했다.

■독도는?

독도는 우산도(512년), 삼봉도(1470년), 가지도(1794년), 독도(1906년)로 지명이 변경됐다.

위치는 동경 131도 52분 10.4초, 북위37도 14분 26.8초(동도), 동경 131도 51분 54.6초, 북위 37도 14분 30.6초(서도). 울릉도에서 87.4km, 육지와 가장 가까운 거리는 울진군 죽변에서 216.8km에 있다. 일본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시마네 현 오키섬으로 157.5km.

면적은 18만7천554㎡(동도7만3천297㎡, 서도8만8천740㎡, 기타 2만5천517㎡)이며 101필지 91개 섬 바위(동·서도 포함)로 이뤄져 있다.

서도는 독도주민이 살고 있는 숙소와 물이 솟는 물골, 어선선가장이 있으며 가장 높은 대한봉의 높이는 해발 168m, 동도는 독도접안 물량장, 독도경비대, 태양열발전기, 등대, 헬기장 등 경비시설이 있고 최고 높은 일출봉은 해발 98.6m이다.

지형은 신생대 화산분출로 생성 절벽과 암초로 형성됐으며 해안선 5.4km, 동·서도간 최단거리는 151m다. 행정구역은 울릉읍 독도리1~96번지(우편번호 799-805), 재산관리청은 국토해양부이며 1982년11월6일에 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보호됐다.

식수는 자연수 및 담수화시설에 의한 인공수, 등록기준지 등재인구 2천204명(2009년 12월31일 현재), 주민등록세대인구 3세대 4명(독도리장 김성도 외 3명). 수자원은 정착성 전복, 소라, 해삼, 문어, 새우, 성게, 게, 미역 등이며 회유성 어류로 오징어, 꽁치, 방어, 볼락어 등이 있다.

/김두한기자 kimd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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