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대한 호불호는 사람마다 다르다. 심금을 울린다고 광고하는 책도 내겐 데면데면하게 다가오는 경우도 있고, 무슨 재미로 읽는지 모르겠다고 남들이 말하는 책도 내겐 흥미를 끄는 경우도 흔하다. 경험 다른 게 사람이니 공감의 진폭도 달라지는 건 당연하다. 따라서 책 한 권에서 느끼는 감동 지수가 사람마다 다른 것은 `취향`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최근에 다시 꺼내든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범우사, 2000)도 딱 내 취향이다. 처음 읽었을 때처럼 주책없이 눈물 나진 않지만, 찔레 순을 씹던 그 시절로 되돌아가 나도 모르게 장면 장면을 곱씹게 된다.

간결한 문체와 소박한 이야기. 별 것 없는데 별 것으로 다가오는 것은 작가네 가족의 거짓 없는 인품 덕이 아닌가 싶다. 작가는 시종 잔잔하고 포근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극동의 소년이 어떤 과정을 겪어 독일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잔물결 위의 나뭇잎이 되어 조곤조곤 이야기해준다.

작가는 개화기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 하에서 의학 공부를 하다 3.1운동에 연루돼 압록강을 건넌다. 만주와 중국을 거쳐 멀고도 낯선 독일 땅으로 망명하게 된 학자의 자전적 성장기는 드라마틱하다 못해 구구절절해야 소설적 기능을 다한 것처럼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전혀 그런 기법을 쓰지 않는다.

그저 작가는 주변인을 섬세하게 챙기고 따뜻한 시선으로 품을 뿐이다. 마치 작가의 부모가 그러했듯이. 사촌인 수암과 집안일을 거들어주는 구월이까지 개성을 불어넣어 포근히 보듬는다.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도피성 외유를 하기까지 파란만장한 삶이 너무 담담하게 그려져 심심하게 느껴질 법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아마도 강요된 휴머니즘이 아니라 책 속에서 절로 우러나는 인간 본연의 감흥 때문에 자꾸 책을 들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정갈한 내용에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 내뿜는 자연발생적 휴머니즘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를 순간순간 깨치게 된다.

신식 공부를 하라고 배려하는 아버지와의 에피소드, 삼일 만세 운동에 연루되어 압록강을 건너야 하는 미륵에게 주는 어머니의 강단 있는 충고 등에서 절로 공감이 간다. 이토록 온화하고 정갈한 이들에게 시대적 정치적 격랑이라니!

자전 소설인 이 책은 개인적이고 가족사적인 동시에 향토적이고 사회적이다. 독일식으로 봤을 때 이국적이고 낯선 이야기가 그들의 교과서에 실릴 정도라면 그 안의 정서는 시공간을 초월해 보편타당한 것이리라. 단순한 향수의 나열이 아니라 그것이 문학적 성과를 담보하였기에 감흥도 따라온 것일 게다. 완전한 정신적 성장을 거치기도 전에 어머니를, 조국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머리가 복잡했을 작가를 연민하는 것은 암울한 시대를 헤쳐 나갔던 작가에 대한 가장 큰 응원이다.

작품 발표 당시 유럽 사회는 이데올로기의 폭풍전야 시기였다. 혼란한 이념을 넘어선 인간 본연의 순수성에 매료된 사람들에게 이 작품이 눈길을 끈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이었다. 어려운 때일수록 단순해지고 소박해져야 답이 보인다는 것을 독일 사람들도 알아챘을 것이다.

흔히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고 말한다. 향토적 서정은 물론이고, 자애 가득한 동양적 훈육관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미덕으로서는 손색이 없다.

“네가 자주 말한 것처럼 시대가 변하였다. 과거는 새 문화에 앞서 갔다. 새 문화는 자주 분수를 모른다. 그러나 네가 그것에서 무엇을 배우려고 하든지 그것이 생소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아야 하며, 또 언제나 온화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144쪽) - 포근하나 크게 이야기 하는 작가를 키운 것은 그의 부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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