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형성 과정서 잦은 전란으로 많은사람 이주” 활발한 인적교류로 선진문화 전파 `해상 루트`

연오랑 세오녀는 신화다.신화는 한민족·한문명권으로부터 전승돼 다양한 문화를 파생시켰고 건축 문화 예술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단어에까지 자취를 남긴다.

연오랑 세오녀 신화는 과연 지역에 무엇을 남겼을까. 그 뿌리를 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삼국유사에 남겨진 237자 10행 남짓의 문맥만으로 연오랑 세오녀의 신화를 증명해내기란 참으로 어려운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연오랑 세오녀는 살아 있는 역사다.

역사는 실증과학이고 시간의 과학이다.

연오랑 세오녀의 역사를 실증하는 연구가 시급하다.

일각에서는 연오랑 세오녀와 일본 천황시조의 연계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는 고민스러운 대목이다.

무엇 때문에 연오랑 세오녀는 일본으로 가야만 했고 왕은 어떻게 됐을까.

삼국유사에 언급된 내용만으로도 당시 한반도의 동해안과 일본은 서로 교류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무엇을 교류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동해안의 소국이었다는 근기국은 일본과 교류해온 해상왕국은 아니었을까.

1900년전 당시는 한반도는 격변기였다.

승자에 의해 쓰여진 역사로 인해 경북 동해안 지역의 당시 강성했던 고대국가가 사라져버린 것은 아닌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10행의 문맥으로 떠나는 역사속의 시간여행은 그런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시작됐다.

20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속의 진실.

경북매일신문이 창간 20주년을 맞아 특별기획한 `신화속의 SEA ROAD를 찾아서`가 독자 여러분을 역사의 시간여행으로 초대한다.

/편집자 註

신화속의 SEA-ROAD를 찾아서 글 싣는 순서
1. 프롤로그

2. 경북동해안지역의 소국
3. 일본속에 숨쉬는 역사적 진실
4. "신화의 고향" 이즈모의 유적들
5. 문화전파의 바닷길 있었나
6. 에필로그

`연오랑 세오녀`가 수록된 삼국유사가 편찬된 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1281년에서 1283년 사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니 13세기 후반의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700여년 전에 이루어진 것이며, 더구나 삼국유사 기이편에 수록된 연오랑 세오녀 부부가 살았던 시기로 나타난 것은 아달라왕 4년, 서기 157년 이어서, 2세기 후반의 일이다.

이와 같은 삼국유사의 사실을 근거로 한다면, 무려 1900여 년 전의 옛날 일인 것이다.

1900여년이나 지난 옛일을 돌이켜서 그 원류를 찾아 추적해보고자 하는 뜻은 이 사실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냐 아니냐?를 밝혀보는 학문적인 규명작업이다.

또 포항이라는 향토를 중심으로 전개된 내용이므로 지금까지 두루뭉실하게 넘어온 향토의 정체성을 밝혀 보고자 하는 시대적 소명이기도 하다.

특히나 다가오는 미래 문화 발전의 시대에 근원이 될 수 있는 바탕을 찾아보는 뜻 깊은 일도 된다 하겠다.

첫 번째 화두 왜 갔을까.

연오랑 세오녀의 원류를 찾아가는 일에는 두 가지 화두를 두었다.

하나는 연오랑 세오녀가 무엇 때문에 일본으로 갔을까?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풀어보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풀어보는 일이 필요하다.

십여 행 남짓한 분량의 연오랑·세오녀 신화는 비록 그 내용이 단조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고대의 한일관계를 엿 보게 하는 우리 측의 몇 안 되는 사료이다.

신라인으로서 연오가 일본의 왕이 되었으며, 세오가 왕비 즉 귀비가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 그들이 간 곳은 일본의 어느 곳인가? 그곳에서 이러한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이 화두는 연오랑 세오녀 부부가 일본에 간 필연성을 찾아내는 것이므로, 먼저 출발지에 해당하는 우리 쪽의 정치, 경제, 문화적 상황 등을 살펴봐야 하고, 도착지인 일본의 사정들을 알아보아야 사실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학계에서는 한반도의 삼국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경북 동해변에 있었던 소국의 정치적 변화와 삼국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빈번한 전란(戰亂)으로, 이에 질린 고대 한국인들이 점차 일본으로 이주하게 됐다고 하는 주장이나, 서기 2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한반도에서는 백제 신라 고구려가 입지를 굳히며 점점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하는 동안 일본에는 수많은 고대 한국인의 마을들이 이루어졌고 이 사람들의 모국인 한반도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왔다는 주장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일본인 중에서도 연오랑과 세오녀의 출항지와 기항지를 영일만과 오키지도부로 추정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 한쪽만의 일방적인 주장만은 아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나 “고사기(古事記))” 에 나타나는 일본 열도로 건너온 삼한(三韓) 삼국(三國)인들에 대한 즉, 일본인들의 조상신(祖上神)들에 대한 사실도 현지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4세기에 들어 일본 내의 고대한국인이 강력한 정치적 집단이 되어 3군데의 중심 세력이 존재했는데 첫째는 나라(良) 중심 이주민, 둘째는 이즈모(出雲)와 기비 지역의 신라 이주민들, 셋째는 규슈(九州) 북부를 차지한 백제인들이었다는 사실들은, 연오랑 세오녀 이후에 일어난 사실일 지라도 먼저 이루어진 사실을 알아볼 수 있는 바탕이 된다는 측면에서 너무나 중요하다.

이 중에서 연오랑 세오녀가 살았던 곳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신들의 고향으로 불리는 이즈모 지역에서 연오랑 세오녀의 원류를 추적하는 것은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일인 것이다.

두 번째 화두 철문화 전달한 지름길 두 번째 화두는 이 루트는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철의 문화가 전해졌던 잊혀진 지름길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연오랑 부부의 출발지를 영일만, 그들의 도착지를 은기국으로 파악하는 일본인 학자들도 있다.

실제 영일만과 일본 은기도 앞의 지부도와는 위도상 북위 36° 반의 위치에 있어, 한반도의 해안과 일본열도 섬과의 거리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니며, 영일만에서 동으로 향하면 대마난류를 타고 아주 쉽게 지부도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영일만에서 일본 열도 은기도 까지의 문화 전파가 쉬운 거리였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삼국유사 연오랑 세오녀 조의 끝 부분에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하였다.

도기라는 말은 오지와도 통하므로 연오 부부가 바다를 건너 지부도에 이주한 다음에 한반도 영일만에 있는 오지라는 지명을 따라 은기국을 세웠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경주에서 열린 신라학 국제심포지엄에서 시드니 대학의 도널드 매칼럼 교수는 “신라와 동해 - 불교조각의 한일관계에서 잊혀진 지역”이란 논문에서 삼국시대에 신라와 일본 사이에 동해를 바로 건너는 해상교통을 통해 활발한 인적 문화적 교류가 있었다고 주장 했다.

매칼럼 교수는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문화가 건너간 루트로 주로 거론되는 것은 대마도와 규슈를 거쳐 일본 내해를 통해 야마토의 본거지인 나라에 이르는 코스지만 이에 못지않게 신라에서 바로 동해를 건너 일본의 이즈모 지방으로 가는 해로를 통해서도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주장한 것이다.

연오랑 세오녀가 살았던 시대는 이 지역에서는 철기시대이며, 일본에 이주 하였을 때는 현지보다는 한발 앞서 있었던 제철 기술을 전하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선주인들을 바탕으로 앞선 철기문명을 가진 이주인들이 해양 루트를 타고 들어와 연합해 나라를 세운 사실들을 표현한 내용이 연오랑 세오녀로 삼국유사 기이에 수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때까지 전해지지 않았던 당시의 첨단 제철 기술을 가진 이주민을 그들의 왕으로 삼았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합리적인 시사점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추적에 참여한 장정남 한빛문화재연구원 부원장과 카쿠다 노리유키 시마네현 현립 고대 이즈모역사박물관 전문연구원 등은 1900여년전의 시공을 거슬러 그때 그 당시를 재현해본다는 입장에서 마음속의 역사적 현장을 가장 중요시하고, 현장이 말하게 하는 가장 객관적인 이해와 해석을 최고의 가치들로 중심에 두었다.

/이즈모시에서 김용우 포항시사편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