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측 첫줄 `辛巳` 표기서 연대추정
분쟁 대상물 반환 판결 내용 담아

이상준 향토사가
정확히 말하자면, 2009년 5월13일 오후 5시14분이었다.

이 무렵 나는 포항시 승격 6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계획 중인 `포항시사(浦項市史)`의 집필위원으로 위촉돼 활동 중이던 터였다. 그 이전에도 향토사에 대한 책을 두어권 편찬한 전력이 있었으므로 지역 언론인들도 지역사에 대해 평소 나에게 자문해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날도 경북매일신문의 요청에 따라 현장에서 비석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 이 비석을 마주했을 때, 그 당시의 떨림은 향토 역사를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 아마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당시 이 비 맨 우측 첫 줄에 건립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辛巳`라는 글씨가 판독됐다. 그러므로 이 비는 441년과 501년, 561년 셋 중 한 시기에 건립된 것이다.

그러나 561년에 건립된 것으로 확인된 `창녕 진흥왕 척경비` 등에는 신라의 관등 명이 `아척간(阿尺干)`, `사척간(沙尺干)` 등으로 표기되고 있다. 이 비에서는 `아간지(阿干支)` 등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 창녕 척경비 보다는 이른 시기인 501년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비는 지난 1989년 포항시 북구 신광면 냉수리에서 발견돼 국내 최고의 비라고 알려진 `영일 냉수리비(503년·국보 제264호)` 보다도 더 오래된 신라 최고비가 되는 것이다. 발견 이후 2009년 9월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처음 학술심포지엄이 열렸고, 이어서 그해 10월에 한국고대사학회 주최의 학술대회가 포항시청 회의실에서 개최된 이래 국내 여러 대학과 단체에서 이 비에 대한 학술심포지엄이 열렸다.

비의 내용은 둘째 행 첫머리에 `교(敎)`, `사탁(沙喙)`, `아간지(阿干支)` 등의 문구로 보아 왕이 사탁부 등의 관리들에게 어떤 내용을 지시했고, 이 지시를 받은 신라 6부의 관리들이 현지로 내려와 분쟁에 대해 회의를 한 것으로 보인다.

`갱환(還)`, `중죄(重罪)` 등의 단어로 보아 분쟁이 된 대상물을 원소유주에게 다시 돌려줄 것을 평의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비석은 판결문 또는 포고문의 성격이라 생각은 되지만, 이 비에는 신라 6부의 명칭과 촌락의 명칭, 관리들의 이름과 관등 기타 해석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내용이 기록돼 있다.

이 비가 신라 최고의 비인만큼 앞으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질 것이고, 곧 국보로 지정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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