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락 포항장성요양병원장

죽음의 이해는 다양하고 산만하다. 민족의 전통사상, 종교, 그리고 현대과학 등에서는 수 많은 견해를 주장하고 있다. 이런 관계로 개인은 잘 다듬어진 생각이나 개념을 갖기 힘들다. 게다가 요즈음은 장수로 인해,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이 과거보다 많이 길어져 있다.

노인이 되면 신체기능과 기억력이 저하되고, 느린 반응 속도, 융통성 감소, 사고 경직, 정보처리 둔화, 자기중심, 의존성과 조심성의 증가, 내향적, 소극, 그리고 대인관계 위축 등의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세포의 끊임 없는 삶과 죽음의 연속으로 새 생명이 재창조 되고, 인류 발전이 계승됨으로 죽음은 사람들이 싫어 하지만 꼭히 존재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죽음의 극복이 아니고, 얼마나 좋은 죽음을 맞이하는가이다.

스토아 주의는 죽음을 삶의 격정적 올무에서 벗어나는 것, 쉘링은 본질로의 복귀, 렛싱은 영원한 새로운 탄생, 동방정교회의 신학자인 베르자예프는 죄가 가득한 세상에서 죽음은 차라리 행복하다는 등, 죽음은 한마디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큰 주제가 된다. 인간은 탄생과 더불어 죽음을 잉태하고 있다. 삶의 과정은 결국 죽음을 탄생시키기 위한 긴 회임기간이다.

죽음의 두려움이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원시상태의 공포(primitive fear), 무서운 고독이 있지나 않는지,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지를 잃어 버리는 것, 신체의 소실, 자기 지배능력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 고통을 어떻게 견딜까, 가족이나 사회에 대한 부담, 인생을 불완전하게 끝낸다는 불안 등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는 과도하면 정상적인 정서 활동이 저해되기 때문에 적정 수준으로 완화할 필요가 있다.

죽음의 공리는 `누구나 죽는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를 모른다. 누구도 경험하지 못하고, 아무도 대신 죽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죽음이란 몸의 부재(不在), 몸을 거절하는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개체의 사라짐이다. 그 죽음이 지금 여기서 살아가면서 죽음을 향해 가는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가 중요하며, 그런 정황에서 추구되고 확보되는 삶이 곧 자기의 `생의 내용`으로 매김된다.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내 삶은 달라진다. 그러므로 죽음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삶의 바탕이어야 한다.

길어진 삶은 청년이나 장년의 연장이 아니고 노년의 몫이다. 그래서 청소년 교육도 중요하지만 좋은 노년을 위한 교육도 중요하다. 노년에서 `죽음의 자리에서 삶을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하다. 죽음 준비 교육은 보다 잘 살기 위한 교육이다.

죽는 순간까지 노력하면서 정상적 활동을 하고, 웰빙(깨끗한 음식, 규칙적 운동, 스트레스 없는 환경) 상태로 사는 것을 원해야 한다.

노인은 노년으로 자기가 자기를 마음대로 못할 때가 되면, 그것이 마지막 정황이므로, 아직 그러한 처지에 오기 전에 살아온 삶을 정리해야한다. 노년에는 물질을 너무 밝히지 마라.

인간은 행복을 서로 깊이 지닐 수 있지만, 죽은 후에는 만남을 기약하지 못하는 이별이 되어서 여러 얽힘을 풀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된다.

행복의 반대편인 정한(情恨)도 잘 다스려서, 죽기 전에 화해와 용서로 풀자. 인간에서 가장 슬픈 것은 `후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이 마지막 순간인 것 같이 `용서해 주세요`, `용서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라는 중요한 4가지 말이 꼭히 필요하다. 용서란 숨기지 않고 드러내 놓고 처리하는 것이다.

이런 인생이든 저런 인생이든 그 어떤 인생이든, 그 무게는 깨끗한 돈과 구겨진 돈과 같이 가치가 동일하다. 각자는 소중하고 귀한 생명 가치를 가지고 있다. 각자는 정신적 사회적 신체적인 면 등에서 정리를 잘하여, 균형 있게, 조화된, 성공적인 노화를 해야 한다. `더러운 것이 있을 때 그것을 깨끗이 하지 않으면 계속 그 안에 남아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