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형편집국장
필자의 고향마을에는 우물이 3개 있다. 유년시절 당시만 해도 40여 가구가 살고 있던 마을엔 큰 기와집이 2곳 있었다. 그 집안 마당 한켠에는 그들만의 우물이 있었다. 단연 부의 상징이었다. 반면, 마을 어귀에는 주민들이 함께 사용했던 공동우물 1개가 있었다.

한 여름, 논밭일로 땀을 쏟고 오신 아버지는 내게 10여분 거리에 있는 기와집내 우물물을 한 주전자 길어오라고 하셨다. 그 집의 우물물은 한여름에도 얼음처럼 차가왔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그 물에 간장을 그득 풀어서는 단숨에 들이키셨다. 많은 땀을 흘려 체내에 결핍돼 있는 나트륨을 그렇게 보충하신 것 같다. 4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공동우물은 물론, 기와집내 우물도 모두 폐쇄됐다. 비록 시골이지만 수돗물까지 공급되고 있는 마을에 공동우물이 필요할리 만무하고 부를 자랑하던 기와집내 식구들도 어디론가 떠나고 폐가만 방치돼 있다. 우리에게 물은 생명이었다. 목말라하는 과객에게 나뭇닢을 띄워 한바가지 물을 대접했던 인심에서부터 자신의 집안에 있는 개인 우물을 마을주민들과 함께 사용했던 이웃간의 정, 또다른 이면에는 극심한 가뭄기에 저수지물을 서로 논에 끌어당기려 이웃간에 칼부림을 했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면.

그래서 우물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자뭇 크다.

우물은 그 속에서 물을 긷는 사람이 있을 때 더없는 샘쏟음을 거듭한다. 물이 있돼 그 물을 사용하는 자가 없으면 우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는 것이다.

우물 얘기가 나온 김에 한가지를 더 소개하자. 2000년 여름, 경주시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 미술관 부지를 발굴하던 조사단원은 이상한 유골 한구를 발견했다. 깊이가 10m를 넘는 통일신라시대의 우물 밑바닥에서 발견된 유골은 7~8세 정도로 추정되는 어린아이였다.

거꾸로 선 채 뻘층에서 거의 온전하게 보존된 유골에는 두개골 함몰 흔적도 있었다. 우물 입구에서 머리부터 떨어져 파묻혀 버렸던 것이다. 손뼈의 위치는 두개골 아래여서 추락할 때 머리를 감싸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부서지지 않은 토기와 소·닭뼈처럼 뭔가 제사에 쓰일 법한 것들이 유골 주변에서 나옴으로써 전문가들은“어떤 의식을 위한 희생으로 바쳐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통일신라시대에 인신공양이 존재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중학교 교사인 역사연구가 성낙주씨는 당시 신라시대의 정치적인 상황과 에밀레종 전설을 결합시킨 흥미로운 학설을 제기했다. 전설에 드러나지 않는 `부재(不在)의 아버지`는 경덕왕, 자식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어머니는 친정오빠 김옹(金邕)과 함께 권력을 농락한 만월부인, 그리고 제물로 바쳐진 어린아이는 권력투쟁의 희생양이 된 혜공왕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에밀레종의 인신공양이 사실일까? 아니면, 신라 왕실의 비극을 빗댄 정치적 우화일까?

우물 얘기의 결론을 낼까. 화엄경에는 `소가 물을 마시면 젖을 이루고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이룬다`는 큰 가르침이 있다. 선거의 계절, 공천을 놓고 이전투구가 가히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출마자들은 스스로가 젖을 뿜어내는 소가 되길 자처하고 있다. 유권자들에게 물을 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자신들이 물을 갖고 있지만 스스로 갈증을 호소하고 있다. 정치가 마음에 안들고 어려워진 살림살이의 원인을 위정자들에게 돌린다.

스스로 생명수를 가진 우물로서의 유권자들은 정치란 생명체에 물을 내려 젖이 샘쏟는 사회를 만들어 내야 하는 가장 기본단계에서의 책무를 갖고 있다. 그래서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선택은 피동형이 되어선 안된다.

보다 적극적으로 우리의 물을 마시고 젖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니면 그 물을 마시고 우리를 병들게 하는 독을 생산하는 사람인지를 냉철하게 구분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물을 가진 우물로서의 백성들이 그 물을 마시고 독을 뿜어내는 악한 정치 때문에 스스로 목말라하고 병들어가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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