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한 / 수필가·前 상주문화회관장
삶이 고되고 힘들 때마다 가끔 “나”라는 존재에 의문이 갈 때가 있다. 육신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지만 커지면서 흘러간 노래 가사 마냥 “인생은 나그넷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를 흥얼거리며 허공에다 넋두리할 때가 있다. 물론 인간지식과 능력의 한계로는 지구 상의 만물만상의 오묘하고 신비한 태초 생성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형체로 나타나는`몸`과 보이지 않는`마음`에다 운명과 타고난 팔자에 끌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밤사이 안녕이라고 불가항력의 재난과 불의의 사고로 졸지에 불치의 병마와 싸우는 신세가 되거나 안타깝게도 요절하는 돌연사를 당하는 경우를 보면 더욱 애달프다.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간혹 생기니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옳은 삶인지? 술 색깔에 따라 투명하고 맑은 청주로 비유되는 성직자나 수도자 삶을 살아야 할지? 또는 텁텁한 막걸리처럼 서민의 삶은 어떻고, 또는 정열에 불타는 양주의 삶을 사는 일부 재벌가나 정치인들을 빗대어 보면 잣대에 따라 누가 부럽고, 초라한지 분간이 안 될 때가 더러 있다.

분명히 인간은 태어나면서 지구상에 자신의 몫이 있기 마련이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저 먹을 복은 제가 가지고 태어난다` 는 옛말을 상기하여 자기의 몫을 찾고 역할과 기여를 해야 할 것이다. 청운의 꿈을 품은 패기, 각고의 노력, 각박한 생존전쟁과 경쟁을 하여 누구는 앞서고 누구는 처지고 때로는 앞, 뒤가 수시로 바뀌어 삶의 현장에는 항상 줄로 세워져 있다.

서열의식에 빠져 남들과의 비교로 자극과 자기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너무 남 의식과 삶에 집착하다 보면, 항상 남 뒤따라 가다가 자기 소신 대로 살아 보지도 못하고 삶을 마감 할 때에 때늦은 한탄과 후회도 하기 때문이다.

더러는 자신의 몫도 못 챙기는 자가 있는가 하면, 하기에 따라서는 몇백 배, 몇 천 배 이상도 자기 몫을 만들어 가는 자도 있다는 것이다. 몇 명의 부자가 수천만, 수억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은 별 차이 없다. 재물이 권력과 정치의 힘으로 특정에 편중되지 않게 하여 노력과 열심히 하고자 하는 의지에 따라 정당한 몫이 돌아가는 배분이 이루어질 때 모두가 바라는 더불어 잘 먹고 잘 사는 사회가 되기 때문이다.

흔히들 “사람의 육체는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간다”는 자연의 회귀 진리를 우리는 알고 있다. 자신의 에너지와 능력과 열정들을 지구상에 모두 쏟고 붓고 발산하여 재물과 영육을 다 비우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며 사회와 국가, 지구상에 태어난 축복이고 소임을 다 하는 것이다.

피둥피둥하게 살만 찌우는 육체와 온갖 재주와 놀라운 능력과 마음들을 분출하지 못하고 삭히는 제 몫과 역할도 못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지 말자는 것이다. 짧은 인간생각에“탄생도 단 한번”“인생도 단 한번”“죽음도 단 한번”에 끝나는 인간은 허무한“단 1회용 인생살이”로 보이지만 세상사는 또 보이지 않는 또 무언가 있다고 믿기에 자연 이치에 숙명하고 공을 들이고 덕을 쌓아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히 인간은 동물과 다른 점은 얼마나 더 가지려는 탐욕보다 물질과 마음을 얼마나 베풀고 나누며 기여하며 사느냐에 의미를 두고 보람과 행복을 찾아 느껴야 할 것이다.

몸을 사리고 마음을 졸이는 비굴한 삶은 인간의 탈을 썬 동물의 삶이고 만물의 영장인 고귀한 인간의 삶이란 몸을 펴고 뛰고 마음을 당당히 활짝 여는 떳떳한 삶을 살아간다면“왜! 사는가?”를 어느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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