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마을이 잘 살아야 잘 사는 나라가 됩니다”

경북 상주 출신의 이상배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한 후 관선 경북도 지사(1986~1988)와 환경청장(1988~1989), 총무처 장관(1991~1992), 서울특별시장(1992~1993)을 거쳐 제15·16·17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어린 시절 군수가 꿈이었다는 이 위원장의 고향에 대한 추억과, 공직생활 및 정계에서의 에피소드 등을 들어봤다.

<편집자주>

-어릴 때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저는 1938년 상주군 은척면이란 외진 시골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은척초등학교와 상주중학교를 다녔습니다. 은척면은 당시 상주군 18개 읍면 가운데에서도 오지에 해당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때 꿈은 군수였습니다. 군수가 마을에서 가장 높은 벼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꿈 때문에 서울대 법대에 다니면서 고등고시 공부를 했는데, 고시에 합격한 것은 4학년 재학 때인 1961년이었습니다.

-공직생활은 어디서부터 시작했습니까.

△대학졸업한 뒤 내무부에 지망해서 경북도에 배치돼 64년에 건설국 관리과에 처음 배정받았습니다. 인턴 때는 여러 보직을 맡았고, 65년에 경북도 공보실장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66년 3월 울진군수로 발령이 나서 부임을 했는데,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 가장 젊은 군수`라는 기록을 세웠죠. 그때 제 나이가 27세였습니다. 제가 그렇게 군수가 빨리 될 수 있었던 것은 고시에 빨리 합격한 것도 있지만, 3대 독자여서 병역의무를 면제받은 덕이었습니다. 또 군수가 되려면 기혼이어야 하는 데, 저는 결혼도 25세에 했습니다. 당시 결혼식 때 경기고 2년 선배이자 고시 동기인 고 건 전 서울시장이 사회를 봤죠.

-건국 이래 가장 젊은 군수로서 에피소드도 많을 듯합니다.

△울진군수로 부임한 뒤 둘째 아이를 낳았는데, 이게 화제가 됐습니다. “군수가 애를 낳았답니다”하는 게 군 전체에서 화젯거리가 된 거죠. 예전 군수들은 모두 50세가 넘어서 부임하다 보니까 애를 낳은 경우가 있을 리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죠. 또 시골노인들이 신임 군수에게 인사를 하러 오는 데, 모두들 의관을 갖추고 와서는 군수실에서 저보고 군수를 찾는 겁니다. 저는 당시 `재건복`이란 공무원복을 입고 있었는데, 군수 방문을 열어봐도 젊은 사람이 앉아있으니 `군수가 어디 갔나` 하고 계속 찾는 겁니다. “제가 군수입니다”하면 그분들이 얼마나 놀라시던지…. 또 노인들이 군수실에 오면 아무리 “담배를 태우시라”고 권해도 담배를 못 피우는 겁니다. 노인들 생각에 `원님이 담배를 안 피우는 데, 어찌 담배를 피울 수 있나`하는 생각이었고, 저는 젊은 나이여서 노인들 앞에서 담배를 피울 생각을 못하니 결국 군수실에서는 아무도 담배를 못 피웠죠.

-안동시장을 지낼 때 재미있는 추억이 있다면.

△울진군수를 지낸 뒤 경북도에 와 있다가 71년도에 32세의 나이로 안동시장에 부임했습니다.보수적인 동네여서 예의범절이 중요했는데, 그나마 저는 어른들에게 잘 보였던 것 같습니다. 특히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러 갔을 때 문답에 대해 잘 알아야만 했습니다. 저의 경우를 들면 인사는 이렇게 이어졌습니다. “관향이 어딥니까?”“예, 경주입니다.”“출입(집사람 본관)은 어디입니까?”“밀양 박씨입니다.”“시하십니까?”“예! 양친시하입니다.”(부친만 살아계시면 엄부시하, 모친만 살아계시면 자모시하)“안행(형제)이 몇입니까?”“삼대독신입니다.”이런 문답을 거치고 났더니 어른들이 “젊은 사람이 예절을 안다”고 인정을 해 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 어른들을 점심에도 자주 모시고 현장에도 초대하고 해서 잘 지냈던 기억이 납니다. 또 안동 시가지에 가로수와 벚꽃을 많이 심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안동에 가 보면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토요일이 되면 반변천 버드나무 밑에서 직원들과 함께 한쪽에서는`반도`를 들고, 한쪽에서는 발로 굴러 물고기를 잡아서 매운탕을 해 먹었던 추억도 새록새록 납니다.

-공직자로서 아쉬움이 있다면.

△공직자로서 결벽에 가까운 행동이 지나쳐 후회하는 일도 있습니다. 하루는 집사람이 “아파서 병원을 가야겠는 데, 관용차는 못 타니 보건소 차라도 보내주면 타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무슨 소리냐. 버스나 택시를 타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아픈 사람이니 보건소 차를 타도록 해도 됐는 데 공직자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지나쳤죠. 결국 집사람은 택시를 타고 오다가 사고가 나서 중상을 입고, 병원에서 6개월간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내무부에서의 생활은 어땠습니까.

△73년 말 내무부로 올라와서 기획예산담당관, 총무과장, 관리과장,지방기획과장, 재정과장, 행정과장 등 6개 과장을 거쳤습니다. 승진이 잘되지 않은 셈입니다. 고시 동기인 고 건씨는 바로바로 승진해 나중에는 내가 지방국장으로 모시게 됐죠. 부이사관이 돼서는 자연보호담당관, 새마을담당관, 내무부 대변인 등을 맡았습니다. 초대 자연보호담당관으로서 자연보호헌장과 배지도 만들었고, 새마을담당관과 대변인을 1년 하면서 기자들을 많이 알게 됐습니다. 그 후 80년이 돼서 대변인을 하다가 경북부지사로 내려갔는 데, 2주일 만에 국보위에 내무분과위원으로 파견됐습니다. 그 길로 청와대 새마을비서관으로 근무를 했습니다. 83년에는 1급으로 민방위본부장으로 근무했는데, 소방국과 민방위국이 산하에 있어서 중공 미그기도 넘어오는 등 여러차례“실제 상황입니다”라는 경보방송을 울리는 책임자로 일했습니다. 그 뒤 내무부 차관보로 갔다가 86년 1월에 관선 경북도지사로 부임해 일했고,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된 뒤인 88년 5월에 환경청장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내무관료로 시작해 환경청은 생소했을 텐데요.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당시 강영훈 장관에게 환경청은 장관급으로 격상해야 한다고 3번이나 브리핑을 해서 관철을 시켰던 기억이 납니다. 그 뒤 저는 89년 7월에 내무부 차관으로 다시 오고, 그다음 해인 90년 1월1일자로 환경부가 장관급으로 격상돼 장관이 부임했죠. 저는 그 후 청와대 행정수석비서관으로 일하다가 총무처 장관, 서울시장을 역임했습니다. 서울시장은 93년 2월에 마쳤습니다.

-오랜 공직생활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저는 군수, 시장, 도지사를 거쳐 장관과 서울시장까지 약 30년 동안 목민관을 지냈습니다. 그래서 늘 주민과 생활현장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정치와 행정은 현장에서 나와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심지어 “현장에 안 나가는 사람은 군수실장”이라고 야단쳤습니다. 실제로 기관장이 공문서에 결재하는 시간은 오전과 오후 한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현장을 중시하고 정직과 열정으로 일을 처리해나가야 한다는 게 제 소신이었습니다. 또 결정하면 바로 추진하는 편이었죠.

-서울시장 때의 일화가 있다면 소개해주시죠.

△서울시장 때는 고지대에 영세민이 모여 사는 일명 `달동네`70여군데를 모두 다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달동네를 관할하는 동사무소와 파출소, 소방서 등지를 죄다 다니며 민원을 들었습니다. 어느 달동네에 가니까 공중화장실 문고리가 없기에 “당장 문고리를 달도록 하라”고 야단쳐 시정한 일도 있습니다.

-공직을 끝낸 뒤 정계에 입문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공직을 마친 뒤 2년 동안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일본에 가서 공부했고, 영어도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에 가서 6개월 공부하다가 왔습니다. 그러다가 95년부터 고향인 상주에 내려가서 96년에 있을 총선에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고향발전에 도움이 돼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96년 15대 총선에 당선돼 16·17대 총선까지 내리 3선 국회의원을 했습니다.

당에서는 정책위의장을 지냈는 데, 그 당시는 당 대표, 사무총장, 정책위의장, 원내총무 순서로 당내 서열 3위의 주요보직이었죠. 2002년 대통령 선거 때는 경북도당위원장도 맡았습니다. 국회에서는 농림해양수산위원장을 지냈는 데, 국회의원 생활 12년 가운데 10년을 농림수산위원회만 하는 기록도 세웠습니다. 나는 농촌이 잘 안되면 중진국까지는 갈 수 있지만 선진국이 되려면 농업이 잘 돼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지금도 농촌 마을이 잘 살아야 잘 사는 나라가 된다는 소신은 변함이 없습니다.

-국회를 떠난 뒤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지난 2008년 3월14일이 공천 발표일이었으니, 벌써 2년이 지났네요. 그동안 경주 이씨 화수회장을 맡아 일했고, 지난해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일하고 있습니다. 비록 비상근이지만 공직에 있을 때나 국회에 있을 때 깨끗하게 지낸 것을 인정받았다는 생각도 들어 보람을 갖고 일하고 있습니다. 국회서 정부 쪽으로 더 가까이 온 셈인 데, 마음은 늘 공인으로서의 도리를 다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정부윤리위원회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습니까.

△행정안전부가 주관하는 데, 윤리국에서 안건을 내면 당연직 4명, 외부 9명의 위원들이 심의의결해 집행하게 됩니다. 외부 위원으로는 교수가 2명, 변호사 출신 2명(법인대표)이며, 당연직은 행안부 차관, 법무부 차관, 기재부 차관, 권익위 부위원장 등이 포함됩니다. 회의는 한 달에 한번 정기적으로 하고, 중요 안건이 있을 때는 수시로 열게 됩니다.

-공직자들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보면 “지역 유지들이 목민관에게 `취미가 뭐냐`고 묻더라도 목민관은 절대 밝히면 안된다”고 합니다. 그만큼 청렴해야겠죠. 그리고 공직자는 조선조 선비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올바른 도리를 위해서는 임금 앞에서도 당당하게 상주하고, 개인적으로 자기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처세를 해야겠죠.

-고향 분들에게 인사 말씀을 하신다면.

△정부에 있을 때나 국회에 있을 때 고향 분들의 많은 도움을 받았고, 나름대로 기대와 성원에 보답하려고 애를 많이 썼으나, 부족하다는 마음뿐입니다. 특히 2년 전 한나라당 공천에서 갑자기 낭떠러지로 떨어지듯 떠나오는 바람에 제대로 인사도 못해서 대단히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아직 여력이 남아있는 한 고향 발전과 고향 사람들이 잘 살도록 하는 일에 힘을 보태겠다는 생각입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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