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D램 반도체 생산 순간 잊지 못합니다”

반도체 산업이 한국에서 태동하던 80년대 초 한국최초의 포토마스크 생산 기술개발로 출발해 숱한 과정을 거쳐 자신의 손으로 생산라인을 설립하고, 글로벌 기업의 경영자로 변신한 사람이 있다. 바로 대구 출신의 정수홍 PKL 회장이자 포트로닉스 아시아총괄사장 겸 COO(최고운영책임자)다. 정 회장은 한국 반도체 산업의 역사이자 한국 포토마스크 산업의 시초이며 성장역사라고 할 수 있다.

포토마스크란 석영기판위에 미세한 반도체 회로를 레이저나 전자빔으로 형상화한 것으로 일종의 반도체 사진원판을 말한다. 정 회장을 만나 글로벌기업의 경영자가 되기까지 겪어온 얘기들을 들어봤다.

<편집자주>

대학시절 고분자공학 전공… 개발자 꿈 키워

80년대 국내최초 포토마스크 생산 기술 개발

포트로닉스 亞총괄사장 등 글로벌 기업 경영

-어린 시절은 어디서 보냈습니까.

△저는 대구시 중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대구 종로초등학교와 경상중학교를 거쳐 대구고등학교와 경북대학교를 졸업했죠. 학부에서는 고분자공학을 전공했으나, 이후 경북대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전자공학을 전공해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사회 초년병 생활은 어땠습니까.

△대학 4학년 여름에 교수님 추천으로 성서에 있는 섬유회사에 잠깐 취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삼성그룹 신입월급이 29만원 정도였는 데, 그 회사는 19만원 정도를 줬습니다. 3일 근무하고 나니 스스로 생각하기에 내 인생이 너무 서글펐습니다. `내가 이걸 하려고 푸른 꿈을 안고 학교를 다녔나`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그길로 회사를 때려치웠습니다. 그리고 인생역전을 위해 기술고시를 준비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다가 우연히 과기처 산하 연구소인 전자기술연구소에서 연구원을 모집하는 걸 보고 지원해 연구원으로 근무하게 됐죠. 구미에 있던 이 연구소는 나중에 통신연구소와 합병돼 ETRI가 됐습니다.

-기술자 출신 글로벌경영자로서 이름이 높은 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요.

△국책연구소에서 포토마스크를 연구하다가 삼성전자에 입사해 포토마스크 생산시설을 설립했고, 듀폰이 포토마스크사업에 진출한다고 해 창업멤버로 들어가 듀폰 포토마스크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 뒤 아남그룹에 포토마스크 사업부로 들어갔다가 IMF를 맞으면서 아남지분을 정리하고 외국인투자를 받아 PKL을 설립해 상장했습니다. 그후 PKL지분을 세계적인 포토마스크 회사인 포트로닉스에 넘기고 아시아 총괄사장과 포트로닉스 COO(최고 운영책임자)를 겸직하고 있습니다. 세계 각국에 11개 생산시설을 가진 포트로닉스의 최고운영책임자(COO:Chief Operation Official)는 미국의 3개 공장, 유럽의 2개공장까지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3개월마다 한번씩 미국에서 열리는 이사회에 참석하고, 공장을 둘러보다보니 고향인 대구보다 더 자주 드나들고 있습니다.

-반도체 회로의 사진원판이라고 할 수 있는 포토마스크 제조기술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1980년 한국전자기술연구소(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소속 연구원으로 국내 최초의 포토마스크 국산화 프로젝트를 수행한 것이 첫 인연이었습니다. 그 당시 한국에서 포토마스크 분야는 불모지였습니다. 전량 일본에서 수입하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전 세계가 분초를 다투며 기술의 수위를 놓고 속도전을 벌이고 있는 반도체 산업에서 시간은 중요한 변수입니다. 더구나 포토마스크 제작을 해외업체에 의뢰할 경우 어렵게 설계한 회로가 포토마스크 제작과정에서 해외 경쟁업체에 유출될 수 있는 위험도 상존했습니다. 바로 이런 점을 해결하기 위해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개발자의 길을 가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개발과정에 어떤 어려움이 있었습니까.

△교수도 참고자료도 부족했고, 기댈 곳 하나 없었습니다. 동료들도 하나둘 중도에 포기해 반도체 공정이나 설계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었습니다. 오기가 발동했습니다. 그래서 해외자료와 기술 논문 등에 의존해 독학을 시작했습니다. 몇날 며칠밤을 새웠는 지 모릅니다. 마침내 1984년, 당시로서는 최첨단이었던 64K D램 포토마스크 개발에 성공했죠.

-처음 포토마스크 생산라인은 삼성전자에서 설립했다고 들었습니다.

△1984년 하반기, 반도체 시장에 막 진입해 고전하고 있던 삼성반도체로부터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저는 `내 나라를 위해 일하자`고 마음먹고 삼성을 택했습니다. 삼성반도체 포토마스크 팀장으로 스카웃돼 기대와 희망에 부푼 마음으로 기흥연구소로 첫 출근을 했는 데, 황량한 공장부지만 있었습니다. 막막한 상황이었고, 갈 길이 요원했습니다. 공장부지를 다지는 일부터 시작해 장비 도입, 인재선발, 개발 및 제품생산 등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관리하고 진행해야 했습니다. 특히 진동, 온도, 습도 등에 대단히 민감한 고가의 전자빔 장비를 수입해 설치하는 데,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이런 장비를 안전하게 운송할 수 있는 마땅한 운송수단도 없었고, 장비를 설치하는 장소도 문제였습니다. 우려곡절끝에 클린룸에 장비를 설치해 아무 이상없이 작동시켰습니다. 그래도 포토마스크를 생산하기 까지는 갈길이 멀었습니다. 팀원 십여명과 함께 거의 수개월동안 날밤을 새다시피 개발에 매달렸습니다. 개발작업이 잘 안 풀리는 날이면 저녁 비행기로 일본으로 날아가 일본 기술진들의 술자리에 끼여 몇마디 얻어듣고는 바로 다음날 귀국하기도 했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풀리지 않는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지만 우리는 결국 해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장비를 설치한 지 3개월만에 1메가 D램의 포토마스크 시제품을 생산해 냈죠.

-그때가 언제입니까.

△시제품 생산후 삼성의 품질팀이 모든 조건을 꼼꼼하게 검사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삼성은 최첨단 제품이었던 1메가 D램 반도체 거의 전량을 자체 기술력으로 생산한 포토마스크 제품을 사용해 제작했습니다. 그것이 1986년 3월이었습니다. 직접 기술을 개발하고 생산라인을 건립해 생산한 포토마스크로 만든 첫 D램 반도체가 생산되는 순간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PKL은 어떻게 설립하게 됐습니까.

△삼성에서 나온 뒤 듀폰의 공장장으로서 경기도 이천의 공장을 설립했는 데, 듀폰은 미국회사여서인지 한국을 투자우선순위에서 제외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반도체 패키지 사업을 하고 있던 A그룹의 K회장으로부터 투자를 받아 새로이 포토마스크 제조회사를 설립하게 됐습니다. 나이 38살에 비록 월급받는 부사장의 직책이었지만 천안 제2산업단지내에 약 8천평 규모로 들어선 A그룹의 포토마스크 공장은 제게 세 번째 공장이 됐습니다. 착공 8개월인 1994년 11월 공장을 완공했습니다. 그러던 중 A그룹이 반도체 IC생산 참여를 결정하면서 기존 고객들의 주문이 끊겼습니다. 그래서 A그룹 회장에게 “포토마스크 사업부를 별개 법인으로 독립시키고, 지분도 다른 투자자에게 일부 팔아달라”고 요청했고, 당시 듀폰과 경쟁관계에 있던 미국 포트로닉스사의 디노회장을 만나 포트로닉스의 투자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래서 1995년에 설립된 것이 포트로닉스 10%, 저를 포함한 임직원 20%, 그리고 A그룹 약 70%지분을 보유하는 회사 PKL입니다.

-IMF때 어려움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해외로 나가 거래를 하던 해외기업으로부터 선수금을 지원받아 유동성 위기를 타개해 나갔습니다. 문제는 재벌그룹 계열사를 정리하란 정부방침이었습니다. 그래서 해외쪽으로 눈을 돌려 HSBC로부터 증자형태로 투자를 약속받았습니다. 문제는 PKL구주를 인수할 기업이 없었던 것입니다. 투자를 약속했던 HSBC도 구주를 인수할 3자가 있어야 약속한 투자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정말 우여곡절끝에 대만의 포토마스크 회사로부터 투자를 이끌어냈습니다. IMF와중에도 PKL은 87억원의 이익을 달성했고, 2000년 8월에는 코스닥에도 상장됐습니다.

-포트로닉스가 PKL의 대주주가 된 것은 언제입니까.

△PKL은 신생기업이었지만 IMF위기에 제값보다 높게 인수자를 구했고, 코스닥에 상장도 했지만 주식시장에서 저평가되고 있었습니다. HSBC가 주가가 오르면 언제든 팔고 빠질 것이란 예측 때문에 펀드매니저이 투자를 꺼리기 때문이란 것을 알았죠. 그래서 저는 2002년에 이미 일부 지분을 가지고 있던 포트로닉스의 디노 회장을 다시 만나 인수합병을 제안했고, 포트로닉스는 HSBC지분과 대만의 T사지분, 그리고 A그룹이 가지고 있던 남은 지분을 모두 인수해 PKL의 지분 70%를 가진 대주주가 됐습니다. PKL은 이제 미국 포트로닉스의 계열사가 됐습니다. 저는 PKL의 대표이사 겸 회장으로서 기업경영에 전념하는 경영자가 된 셈입니다. PKL은 2002년 IMF위기가 수습되고, 당시 450억 규모 매출에서 해마다 성장을 거듭해 2006년에는 1천700억규모로 3.5배 성장했습니다.

-향후 포토마스크 사업전망과 계획은 무엇입니까.

△앞으로 아시아 시장이 향후 세계 반도체 시장의 중심축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시아 지역의 성장은 전세계에서 중국이 가장 큰 IC시장으로 부상한 것에 기인합니다. 2005년 408억달러의 중국 반도체 시장은 2010년 3배이상으로 늘어 1천240억달러에 달합니다. 저는 포트로닉스의 글로벌 네트워크 체제를 활용해 전 세계 사업장의 프로세스를 표준화하는 한편, 공동구매를 통해 경영효율화를 추구하고, 인력교류 시스템을 구축해 기술인력을 양성할 계획입니다.

-대구·경북지역에도 기업을 갖고 있다면서요.

◆지난 2001년 대구 성서에 블랭크 마스크라는 포토마스크 원판 생산공장인 SNS TECH를 설립해 1대 주주로 있습니다. 코스닥에 상장돼 있는 회사로 매출은 연간 520억원 정도입니다. 또 달성산업단지공단에 특수세라믹 제조회사인 SHEC가 있는 데, 역시 1대주주로 있습니다. 이 회사는 아직 매출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포부가 있다면.

◆먼저 포트로닉스와 PKL에서 월급을 받고 있는 만큼 포트로닉스 를 잘 키우고자 합니다. 두번째는 개인회사인 SNS TECH도 자본금이 있는만큼 M&A를 해서 키워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신규사업을 많이 찾고 있습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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