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신객원논설위원·문화중고 동창회장
필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1960~70년대 졸업식장엔`축 졸업`이라고 써진 원통형 상장 통을 파는 사람이 꽃 파는 행상들보다 훨씬 많았다.

뽐낼만한 상장을 넣기보다는 졸업장을 달랑 들고 가기가 민망한 학생들이 이 통을 더 많이 이용했던 것 같다. 당시는 우등생과 3년 개근학생 몇 명이 단상에 올랐을 뿐이다.

그때는 집안일을 도우면서 학교를 다니다 보니 지각을 밥 먹듯 해서 1년 개근조차 상상할 수 없었던 처지였다.

요즘처럼 수상자도 많고 3년 개근학생이 졸업학생의 90%가 될 수 없는 딱한 처지였으나 “빛나는 졸업장을 가슴에 안은 형· 언니들께... 잘 있거라 아우들아”를 일 이 절로 나눠 부르며 눈물바다가 되곤 했다.

졸업식 날 짜장면 한 그릇 얻어먹으면 넉넉한 집안이었다. 그래도 친구들은 잘 알려진 장소를 정해놓고 20년, 10년 후에 만날 타임캡슐을 각자의 가슴에 묻고 헤어졌다.

학교 졸업은 새로운 꿈에 도전하는 것. 그래서 요즘 졸업식장에선 눈물이 사라진 대신 졸업생 모두가 주인공이고 개성이 넘치는 한바탕 축제여서 다채롭다.

어느 초등학교에선 모든 졸업생들이 상을 받는다고 한다. 효도상, 봉사상, 종이접기상, 달리기상 등 튀고 다양하다.

너무 튀다 보니 교복을 칼로 찢고 바닷물에 빠뜨리기 등 볼썽사나운 현장이 언론에 노출되어서 부모의 걱정거리가 되기도 한다. 고등학교보다는 중학교가 더 심심하고 남녀 공학학교가 더 튀는 것 같다.

안도현은 시 2월에서 “발등에서 머리끝까지 밀가루 하얗게 뒤집어 쓰고../ 그래도 장차 시대 구분할 임자는/ 이 흥청대는 아이들 중에 있다.”고 썼다.

우리 대학은 지금 정반대다. 실업자 110만 시대에 하필이면 졸업이냐는 한탄이 절로 묻어나는 것 같다. 사상 최악의 청년 실업난이 원인이다.

우리 경제가 급성장을 했지만 단순노동을 요구하는 제조업의 비중이 커서 고학력자의 취업이 여간 어렵지가 않다.

IMF위기가 신호탄이 됐다. 연이은 구조조정으로 인해 꽃다발을 들고 온 아버지는 중년 백수가 되었고 졸업하는 아들은 직장 구하기가 안개길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계절이 닥친 셈이다.

축하하는 말을 건내기조차 조심스러운 눈치들이다. 학생들이 가장 듣기 싫은 인사말은 `너 직장 구했어.`다.

그러니 졸업식 날에만 갖는 설레고 들뜬 분위기가 나올 수 없다.

`소황제`로 자란 신세대가 힘든 일을 피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따라붙기는 하지만 대학 진학률이 2006년 80%(62만 명), 그리고 2005년 들어서부터 국민 16명 중 1명이 대학생(292만 명)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 졸업장이 취업의 보증수표자리를 놓친 지는 오래돼 버렸다. 1976년 전문대를 합쳐 4년제 대학 졸업생 수는 5만8천3백 명에 불과했다.

왕조가 망하고 신분제가 폐지된 이후 상당기간 어느 국가이던 대학 졸업장은 신분 상승의 유일한 통로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실정으로선 중산층이 되기에도 힘들게 됐다.

미국이나 중국 역시 평가절하는 우리와 마찬가지다. 4백만이 넘게 교문을 나서지만 60%가 실업자가 되는 중국의 경우는 의대와 법대 취업이 가장 낮다.

어쨌든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연전 어느 대학의 졸업식 축사를 통해 “가장 위대한 성취는 `왜`라는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에서 탄생되니 평생 이 마음을 놓지 마라”고 당부 했다.

처칠의 대학졸업식장 명언은 단 두 마디 “포기하지 마라.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였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인생에서 아홉 번 실패는 아홉 번 노력한 것”이라고 했다.

졸업은 사회 첫발을 내딛는 또 다른 시작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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