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신객원 논설위원·문화중고 총동창회장
세계는 갈수록 하나로 묶여지고 있다. 30여년전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세계 각국에서 일어난 사고 현장에는 한국인이 몇 명씩 꼭 끼여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계 각국을 누비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나라의 위상은 진취성을 지닌 국민을 얼마나 배출하였는가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글로벌 인재가 많을수록 지구촌에 대한 기여도 역시 그만큼 높아질 터. 지구면적의 0.1%에 불과한 한반도에서 이러한 정신을 지닌 첫 세계인으로는 신라 승 혜초(704~787)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혜초는 16살 나던 해 신라에서 중국 광주로 건너가 천축에서 온 밀교 승 금강지를 만나 밀교 공부를 시작한다. 723년 중국 승려 80명과 함께 광주를 떠나 뱃길로 동천축(지금의 벵골만으로 추정) 나신(身)국에 도착했다.

혜초는 맨발의 걸승차림으로 폭우와 피부를 태우는 폭염, 풍토병에 시달리면서 북인도 일대를 구법 여행하는 등 4년간 인도와 서역 일대를 돌아보고 727년 파미르 고원을 넘어 당나라 안서도호부(安誓都護府)가 있었던 쿠차에 도착했다.

80명이 갔으나 돌아올 때는 14명 또는 혜초만 돌아왔다는 설이 있다.

천축국에 신라 프런티어십을 구현한 스님은 혜초만은 아니다. 현격, 혜업(惠業), 현태(玄太), 6세기 전반 백제의 겸익이나 북인도 나란다 불교대학 유학승 혜륜(惠輪), 현본(玄本), 현유(玄遊), 아리나발나등 인도 불교가 쇠퇴하는 7세기 무렵까지 천축을 드나들은 모험 승은 여러 명이다.

승려 1천여 명이 공부한 나란다의 신라 유학승으로서 신라나 당으로 돌아온 스님은 기록상으로는 혜초와 현태뿐이어서 그 여정이 험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필자도 지난해 1월 석가모니가 태어나 깨닫고 불법을 전한 북인도를 여행 중 나란다에 들려 유학 승들의 공부방 뒤편 어딘가에 있을 부도 탑에서 신라인들의 흔적을 찾아 헤매었던 기억이 난다.

1300년 전 혜초가 쓴 두루마리(왕오천축국전)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00년 전의 일이다.

1908년 프랑스 동양학자 펠리오가 발견 당시에는 9장의 항마지를 이어붙인 길이 358cm, 너비 28.5cm에 앞뒤가 잘려나갔지만 전체 1만 3천자로 추정되는 글 중 6천300자를 해독할 수 있었다.

혜초는 부다가야의 성도성지(成道聖地)에 이르자 “본원(本願)을 이루었으니 환희(歡喜)로 벅차다.”라고 적었다. 불교의 발전 과정은 물론 의상과 풍습 언어 음식까지 기록하는 한편으로는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던 보디가야와 열반했던 쿠시나가리, 녹야원 등에 있는 4대 스트파(탑)를 순례하고 남천축(데칸고원), 중천축을 찾았다.

북인도를 지나 불상이 처음 만들어졌던 간다라와 카슈미르 토화라(아프카니스탄)에 얼마간 머물다가는 한 달 열흘이 걸린 대식국(아랍)여행에 도전, 페르시아 니샤푸르에 도착한 걸로 알려졌다.

한국인으로 아랍권 여행은 혜초가 처음이다.

혜초의 여행기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나 오도릭의 `동유기` 이븐바투타의 `이븐 바투타 여행기`와 함께 세계 4대 여행기이지만 다른 여행기를 뛰어넘는 독특한 내용이 적지 않다. 특히 5언 시가 다섯 편이나 실려 있는 것이 3편의 여행기와는 달리 서정적 흐름이 있어 더 빛난다.

풍토학으로 보면 반도인(半島人)은 진취성이 강하다고 했다.

신라시대에 왕성했던 진취성은 고려로 넘어오면서 극락→현세→지옥으로 단순화시킨 고려불교 정신에다 사대주의가 억제장치가 되었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왕토를 10리만 벗어나도 극형에 처하는 쇄국정책과 불교 탄압으로 인해 산속 깊이 그 정신이 숨어 버렸다.

21세기 들어 세계가 지구촌으로 변화하고 있으니 반도인의 진취성이 다시 꽃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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