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문 교수 `부서진 말들` 민음사 刊, 148페이지, 8천500원

한 줄의 시구에 현현할 수 있는 가장 깊은 사유, 단순하고 꾸밈없는 시어 너머로 펼쳐진 유장한 사상의 지층. 박이문 교수의 신간 `부서진 말들`은 절제와 원숙함만이 빚어 낼 수 있는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를 보여 준다.

소르본 대학교와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오늘날까지 세계 각국 유수의 대학에서 지적 탐구와 후학 양성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개진해 온 `시대의 지성` 박이문 교수는 수많은 명저를 남긴 철학자이자 사상가인 한편, 평생을 통해 시를 창작해 온 시인이기도 하다. 특히 박이문 교수의 시인으로서의 이력은 그의 다른 이력들과 마찬가지로 유례없이 `세계적`인 것과 맞닿아 있다. 해외 체류 시절 동안 영시집을 출간하고 독일어 번역 시집을 출간하는 등 실제 해외에서의 활동이 활발했던 것이다.

`부서진 말들` 역시, 그가 1993년 영시집으로 먼저 출간한 `Broken Words`의 한국어 번역본으로, 오랜 해외 생활에서 느낀 소회와 방랑의 정서가 돋보이는 서정시와 평생을 천착해 온 철학의 본질적 주제에 대한 성찰이 배어든 철학시, 그리고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관조가 빛나는 일련의 세태시까지, 각각 `INSIDE`, `OUTSIDE`, `SIDE BY SIDE`라는 제목의 장으로 나와 타인과 세상에 대한 깊은 사유를 그리고 있다.

어딘가에 존재할 완전함을 찾아 편린들 사이를 유랑해 온 `영원한 에트랑제` 박이문, `부서진 말들`은 그가 만년에 도달한 `어느 완전함`을 엿볼 수 있는 시집이다.

국내외 유수의 대학에서 평생 가르침과 연구에 힘쓰며 해답을 추구해 온 `철학자` 박이문 교수는 그러나 유독 시를 쓸 때만큼은 애써 해답을 구하지 않는다. 시인으로서의 그는 나아가 철학이 해결할 수 없는 생의 부조리를 노래하고 있다. 철학적 사색을 담은 시편에서조차 그는 철학 너머의 것들, 시만이 말할 수 있는 부정형의 것들을 말하는 데 집중한다. 심지어는 철학이 가져다준 모종의 절망까지도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 음성으로 토로하고 있다.

“내가 나비의 꿈이라면

내가 나비를 꿈꾸고 있다면

내가 꿈을 꿈꾸고 있다면

깨어 있건 아니건

상관없다, 아무 상관도

당신이 바람에 시를 쓰는 동안에는

도대체 철학이 뭐란 말인가

난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철학을 고찰함`)

일생을 해답을 규명하며 철학에 바쳐 온 시인이 시를 통해 보여 주는 해답 이면, 철학 이후의 지평은 그 자체만으로도 `일견의 가치`가 있다. 그것은 이 시집이 보여 주는 모든 것들이 어둠이 “부처보다 현명한 것”(`지평을 넘어서`)이 되는 바로 그 지평에 서서 시인이 직접 바라본 풍경이기 때문이다.

캄보디아 난민 어린이의 크고 황량한 눈동자와 바그다드로 향하는 고속도로에 흩뿌려진 죽은 병사의 연애편지. 부산 제5연대 군 병원의 악취 풍기는 병동과 휴전 협정 이후 말없이 누운 수백만의 시체 위에 선 38선. 그러나 이토록 아픈 세계를 시인의 눈은 다만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한다. 고통스럽지만 결코 시선을 떼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포기할 수 없는 애정을 품고 있음을 의미한다.

“언제나 대답 없는 질문이 있고

언제나 해답 없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밤은 너무 어두워

나는 눈을 감는다

거기 없는 신을 보기 위해”

(`한 무신론자의 기도`)

비록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있는 그대로 세상을 사랑하며 모두를 위해 “내가 믿지 않는 신을 향해” 무릎을 꿇는 삶. 박이문 교수의 시를 통해 우리는 철학을 통해 세계를 알고, 또 시를 통해 세계를 사랑할 수 있는 생의 가치를 읽게 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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