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도출신의 김준곤(55) 법무법인 삼일 대표변호사는 청도읍 부야리 곰티재 골짜기에서 태어났다. 김 변호사는 청도 중앙초등학교와 청도 모계중학교를 거쳐 대구상고와 경북대 법대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후 한국외환은행에 2년여를 다니다가 뜻한 바 있어 사법시험을 준비해 1988년 시험에 합격했고, 사법연수원 20기로 대구에서 변호사사무실을 열었다.

이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들의 모임(일명 민변)을 주도했고, 경실련 조직위원장, 대구지하철 참사 인정사망 심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지난 2004년 대구 달서갑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한뒤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 사회조정비서관을 지냈다. 지난 2008년부터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상임위원으로 일하다가 지난달 13일로 임기만료했다. 김 변호사를 만나 어린 시절 고향에 어린 추억부터 변호사 생활, 공직생활 등에 얽힌 이야기 등을 들어봤다.

<편집자주>

-어린 시절의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어릴 때는 은행에 들어가 은행장이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저는 5남3녀중 5번째인 데, 누나 2명에 형이 2명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농사일에 바쁠 때는 누가 저녁 늦게 자면 밥을 먹고 자는지, 안 먹고 자는지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런 동네에서 고시에 합격했으니, 개천에서 용 난 셈이 됐죠.

-대학졸업후 은행을 다니다가 사법고시 공부를 했는 데, 계기가 있었습니까.

경북대학에 다닐 때 기독청년회(KSCF)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민청학련과 연결되는 써클이어서 흔히 요주의단체로 감시를 받고 있는 써클이었습니다. 그러나 긴급조치 시대에 이념서클의 회장이 되고 나서는 당국의 감시를 견디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휴학하고 군대에 갔습니다. 복학을 한 후 졸업과 동시에 대학써클에서 부회장을 하던 친구와 결혼을 했고, 바로 외환은행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리고 2년 동안 은행원 생활을 하는 데, 서클 활동하면서 나눴던 생각들, 특히 사회에 대한 정의나 의무감, 하나의 밀알이 썩어야 한다는 등의 대화들이 늘 머리에 남아 떠나지를 않았죠. 심지어 내가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이 죄악이라는 사회적 의무감마저 들었습니다. 그래서 은행을 뛰쳐나와 고시를 시작했어요. 집사람은 당시 “당신같이 사람 좋아하고 어울리기 좋아하는 사람이 엉덩이 짓물러지도록 공부해야 하는 고시를 어떻게 하려고 하나.”라며 만류했지만 과감하게 사표를 냈습니다. 공부시작 4년 7개월만인 1988년 10월 시험에 합격했죠.

-변호사 개업후 사회활동을 매우 활발하게 했더군요.

사회적 의무를 다하겠다고 마음먹고, 뜻을 같이 한 사람끼리 만나야 한다고 해서 만든 것이 바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들의 모임`입니다. 사회운동을 혼자 해서는 결국 돈에 매몰돼 번 돈으로 땅이나 보러 다니게 되고 만다는 생각에서 그런 모임을 한 것입니다. 이때 합류한 사람이 지금도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연수원 21기 최봉태 송해익 변호사입니다. 경실련이나 대구환경운동연합에서 일한 것은 이런 분야에서 일하는 변호사가 많지 않다보니 도와달라고 해서 같이 하게 된 것입니다.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에서 겪은 에피소드가 있다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허원근 일병사망 사건등을 발표할 때 마다 사회적 이슈가 됐습니다.한총련 투쟁국장 김준배 치사사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의문사 진상규명위에서 이 사건을 인정으로 판정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위원장이 “대법원이나 검찰에 물어보고 결정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하는 겁니다. 저는 “위원회가 무슨 종로지청이냐. 뭘 물어보냐”면서 문을 박차고 나갔죠. 결국 그 건은 위원장 의견을 소수의견으로 달아 `인정`으로 결정했습니다. 청와대에서도 김준배 사건 발표를 잠시 미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나는 “우리 사회가 그리 허약하지 않다”고 답한 뒤 발표를 밀어붙였습니다. 예상대로 아무런 반향이 없었어요. 아마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집권하기 전 좌익논란으로 고생한 까닭에 나온 기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사회적 반향도 있었지만, 눈치 빠른 변호사들은 그 사건을 받아서 실속을 많이 챙겼습니다. 그제서야 `재주는 곰이 부리고, 공은 떼놈이 번다`는 말이 실감나더군요.

-대구 지하철참사 인정사망 심사위원회때 고생 많이 하신걸로 압니다.

당시 시민단체에서 7명, 대구시에서 7명씩 추천해 구성했습니다. 위원장은 총리가 지명한다고했는 데, 시에서는 고등법원장을 거쳤거나 대학총장을 한 사람을 지명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후보자들이 모두 손사래를 치며 거절해 결국 내가 위원장을 맡게 됐어요. 아마 3월10일쯤 시작해 한달간 심사해서 2명이 한팀으로 심사해서 의견이 일치되면 전체 회의에서 통과시키는 방식으로 심사했습니다. 600여명이 신청해 196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정됐습니다. 그중 190명은 밝혀졌고, 5~6명은 신원을 못 밝혀내 그 몫만큼 보상금을 따로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당시 일화로는 유족대표가 와서 회의를 하는 데, 유족 가운데 하나가 유인물을 돌리는 것을 보고 “당장 나가라”고 일갈을 했더니 군소리 않고 나가더군요. 그런데 그 장면을 본 대구시의 한 공무원이 “이런 상황에 누가 유족에게 소리를 칠 수 있겠느냐.”고 감탄어린 말을 하더군요. 그래선지 그 다음날 신문에 `지하철 참사와 관련해 대구시와 검찰, 경찰의 권위는 다 무너졌는 데, 유일하게 권위가 서 있는 곳이 지하철 참사 심사위원회`란 내용의 기사가 나기도 했죠.

- 청와대비서관으로 근무했는 데, 어떤 계기로 들어가게 됐나요.

지난 2004년 열린우리당 후보로 대구 달서갑에 출마해 떨어졌고, 낙선자들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사회조정 비서관으로들어가게 됐습니다. 거기서 18년동안 결정을 못했던 방폐장 문제, 새만금, 천성산, 경인운하, 한탄강 댐문제 등 사회갈등을 조장하는 문제들을 죄다 다뤘습니다. 전혀 권력을 휘두를 소지가 없는 분야였죠. 재직하는 동안 방폐장이 경주월성으로 지정됐고, 새만금 역시 바닷물을 틀어막는 공사를 마쳤습니다. 천성산 문제도 이슈가 해결되고 나왔죠. 이명박 정부 들어서 시민사회수석실을 없애는 걸 보고 현 정부가 대화와 타협의 자세가 아니고, 밀어붙이기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4대강이나 세종시 문제가 모두 그렇지 않나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는 어떤 일을 했습니까.

인권침해 분야 소위원장으로 일했습니다. 위원회는 권위주의시대까지의 인권침해사례를 다루도록 돼 있는 데, 문제는 어디까지가 권위주의 시대이냐가 정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까지 포함시키자고 했으나, 맞다 아니다 토론끝에 일단 노태우 전 대통령까지만 포함시키기로 잠정 결정했습니다. 그 뒤 이명박 대통령 집권이후에는 다시 전두환 전 대통령까지로 바뀌고 말았죠. 그래서 부산 동의대 사건은 기각되고 말았습니다. 이외에도 납북어부 간첩조작사건, 조봉암사건, 조용수 사건, 재일동포 간첩조작사건 등 주로 간첩조작사건이 많았습니다.

-지난 달에서야 공직을 끝내고 다시 변호사로 복귀했는 데, 소감은.

지난 2002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 진상 규명위원회 상임위원(별정1급)으로 공직을 시작해 청와대 비서관까지 근무하고, 잠깐 변호사 사무실로 복귀를 했다가 2008년 1월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차관급)으로 다시 들어가 생활했습니다. 약 8년 동안 변호사 사무실을 떠나있었죠. 서정주의 `국화앞에서`란 시 구절처럼 `이제 돌아와 거울 앞에 선`그런 심정입니다. 젊었을 때 한때는 마음먹고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이뤄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에 차 있어서 국회의원 출마도 했지만 이제 그런 것은 젊음의 뒤안길로 흘러간 것 같습니다. 요즘은 친구들이 “이제야 말로 어디 한번 출마해 보지”라고 권하면 그냥 빙긋이 웃고 맙니다. 그동안 좌냐 우냐 생각하지 않고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하면 내 소신대로 일을 해왔는 데, 진보니 뭐니 하며 프레임을 걸고, 비난을 하는 일에는 이제 그만 휩쓸리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6.2지방선거에 나설 생각은 없습니까.

저는 중앙공무원을 하던 사람이 기초단체장인 군수로 출마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봅니다. 특히 시골 선거는 대도시와는 달라서 상대편은 원수가 됩니다. 선거끝나고 난 뒤에도 패가 갈립니다. 인심좋은 시골이 선거로 황폐화되는 게 아닌가 걱정입니다. 청도도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가끔 초등학교 동기나 중학교 동기들이 “큰 일을 해야 되지 않겠나.”하면 “같이 늙어갈 사람들이 무슨 소리하나. 노년을 같이 보낼 사람들끼리 그런 얘기 하지마라.”고 얘기합니다.

-끝으로 대구 경북지역민들에게 인사말 한마디 하시죠.

8년만에 변호사란 본업으로 돌아오면서 고향생각을 하면 늘 `넉넉하다`는 생각에 푸근함을 느낍니다. 이제 고향의 품에 안기게 됐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귀향을 했고, 고향분들이 그렇게 받아들였으면 참 좋겠습니다. 언젠가 아들을 설득하기 위해 여행을 가면서 제가 “변호사로서 사회봉사는 작은 봉사고, 정치는 더 큰 봉사”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정치는 후배들이 할 일이라고 여기고, 변호사로서 본연의 업무에 충실할 생각입니다.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김진호기자 kjh@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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