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네 집 뒤안에는 장판지 두 장만큼한 먹오딧빛 툇마루가 깔려 있습니다. 이 툇마루는 외할머니의 손때와 그네 딸들의 손때로 날이날마다 칠해져온 것이라 하니 내 어머니의 처녀 때의 손때도 꽤나 많이는 묻어 있을 것입니다마는, 그러나 그것은 하도나 많이 문질러서 인제는 이미 때가 아니라, 한 개의 거울로 번질번질 닦이어져 어린 내 얼굴을 들이비칩니다.

그래, 나는 어머니한테 꾸지람을 되게 들어 따로 어디 갈 곳이 없이 된 날은, 이 외할머니네 때거울 툇마루를 찾아와, 외할머니가 장독대 옆 뽕나무에서 따다 주는 오디 열매를 약으로 먹어 숨을 바로 합니다. 외할머니의 얼굴과 내 얼굴이 나란히 비치어 있는 툇마루에까지는 어머니도 그네 꾸지람을 가지고 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미당 시전집1`

(민음사,1994)

10년 전, 미당 선생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그에게 조문(弔問)을 가지 못했다. 달포 후쯤, 나 혼자서 그의 유택(幽宅)에 엎드려 술잔을 올리고 오랜 시간 대화도 나누었다. 가지고 간 그의 전집을 펼쳐들고 생전 그의 노래도 몇 곡 들려주기도 했다. 미당의 노래가 지닌 매혹 때문인가. 위 시는 다급한 핏빛 언어로 세계와 맞닥뜨리던 첫 시집 `화사집`의 세계를 지나 그의 언어가 점점 둥글어지고 깊어져 가던 시집 `질마재 신화`에 들어있는 작품이다. 산문시이지만 내재적인 율격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유년기의 애틋한 추억에 그 내용을 기대고 있지만 나약함이나 감상성이라곤 찾아보기 어렵다. 그건 `하도나` `인제는` `되게` `따로` `바로` 등의 효과적인 부사어 사용에 기인한 것이겠지만, 결국 그건 시어 구사의 미당만의 자신감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시인>

`이종암의 詩 산책`은 오늘 字로 끝이 납니다. 다음 주부터는 `김만수의 열린 詩세상(가제)`을 연재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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