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巨儒` 송시열 장기면서 유배생활… 학문 발전 영향
동해면 출신 석곡 이규준 `의감중마` 저술 한의학 분야 큰 획

포항시 신광면 우각리에 있는 여강 이씨 고택(古宅)은 문원공 회재 이언적의 다섯 손자 중 막내로 출생한 오의정(五宜亭) 이의온(李宜溫, 초휘(初諱)는 의택(宜澤), 1577~1636)이 17세기 이후 세거해 온 곳이다.

공(公)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가하여 전공을 세워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을 제수 받았고 귀향(歸鄕)해서는 오의정 정자를 직접 짓고 칩거했으며 2005년에는 고택 전체가 경북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 받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대 난은 조선의 국세를 크게 위축시켰으며 왕권의 약화를 초래했다. 특히 병자호란 이후 효종, 현종대는 우암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 노론(論) 정권의 신권(臣權)이 정계를 좌지우지했다.

그러나 그 종말은 숙종의 등극과 함께 이뤄지게 된다. 14세의 어린 군주 숙종은 70세의 국노거유(國巨儒)인 우암 송시열을 기해예송(己亥禮訟) 논쟁의 과실을 물어 현종 장례가 끝나자마자 함경도 웅천에 위리안치 시켰다.

이후 사약이 내려지기 전까지 그의 생은 유배생활로 점철되지만 그가 머문 장기면 지역 유배 5년간은 지역의 백성들에게는 거유(巨儒)를 통해 유학을 배울 수 있는 행복 그 자체였다.

1675년 5월 웅천에서 다시 이배돼 6월 장기에 도착해 1679년 (우암 73세)까지 5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특히 동인(東人)의 학풍이 강했던 영남지역에서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뿐만 아니라 장기유학 발전에도 큰 족적을 남겨 오늘날 포항의 서원들이 포은을 배향하고 있는 오천과 더불어 장기에 가장 많이 분포돼 있는 점 역시 이러한 영향일 것이다.

조선후기 사림 집권이 붕당(朋黨)정치의 폐해를 낳게 되자 정쟁(政爭)에서 밀려난 남인(南人)과 소론(少論) 계열의 양반들 사이에서 반성과 더불어 조선의 습속에 맞는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 연구가 일어난다.

이가 실학의 학풍으로 그 선구자는 반계 유형원을 시작으로 이조(二祖·18세기) 성호 이익, 삼조 (三祖·19세기) 다산(茶山) 정약용에 의해 집대성 된다. 다산이 잠시 장기에 유배돼 머물러 그 영향은 미미하지만 오늘날 장기에 유배문학을 탄생시킨 공은 있는 듯하다.

19세기를 풍미한 실학의 학풍은 동해면 임곡리(林谷) 출신의 석곡(石谷) 이규준(철종 1855~1923)에 의해 한의학 분야에서 일획을 긋는다. 공은 삶의 터전이 된 동해면 석동의 지명에 따라 석곡이라 호를 정하고 평생을 제세구민(齊世救民)에 바치고 향년 69세에 졸(卒)했다.

석곡은 주자 성리학의 주(註) 소(疏)를 비판하며, 육경(六經)의 주소를 다시 가필(加筆) 교정(矯正)했으며 특히 동양 한의학의 출발이라 할 수 있는 황제내경을 새로이 해석하고 핵심내용을 추려 `황제내경 소문대요`를 기술하며 부양론과 기혈론에 해당하는 `의감중마`를 저술했다.

특히 의감중마는 동의보감에 바탕을 둔 저서로 현재 한의학계에서도 중요한 의서(醫書)로 평가 받고 있다. 지금도 동해면에는 선생이 약초를 공급하기위해 아랫동네에서 약초를 많이 재배하게 해 약전리(藥田里)라는 지명이 남겨져 있으며 석동에는 선생의 사상을 였볼 수 있는 목판본 300여점이 보관돼 있다.

조선 500년 유학의 흐름을 포항사를 통해 되짚어 보며 매일 인시(寅時·새벽 3~5시 )에 일어나 수신(修身)으로 하루를 시작한 선비들을 생각하며 경인년 새해 1년의 성실한 다짐을 길조(吉鳥)인 서설(瑞雪)을 바라보며 마음 가운데 새겨본다. <끝>

/안수경(포항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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