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은 한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에서는 변방이자 유배지이다.

그렇지만 조선 500년 정신문화인 유학의 맥은 유유히 이어지고 있다.

경인년(庚寅年) 새해를 맞이해 조선 500년 시대사조(時代思潮) 속에 포항 유학의 흐름은 어떠했는지, 유학사에 어떤 자취를 남겼는지, 나아가 호시우행(虎視牛行)하며 백호의 기상을 잃지 않은 포항 선비들은 그리고 그 정신은 어떠했는지 되새겨 보려한다.

먼저 불사이조(不事二朝) 정신으로 조선 개국을 반대한 문충공 정몽주(鄭夢周)를 추앙하며 형성된 사림(士林)은 그를 조선 유학의 시조이자 조선 정신의 사표로 삼고 있다. 그의 고향이자 영일 정씨의 오랜 세거지인 오천에는 오늘날에도 영일 정씨 집성촌이 형성돼 있으며 포항을 충효의 뿌리이자 본고장의 출발점으로 삼게 했다.

이후 사림들은 세조년간 중앙정계에 진출을 시작해 4차례의 사화(士禍)를 거치며 지방을 거점으로 성장, 선조이후에는 조선 정치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자리 잡는다. 포은이 사림의 선구자라면 사림의 근간을 확립한 이는 문원공(文元公) 회재 이언적(李彦迪)이다. 회재는 명종(明宗)조에 있었던 마지막 사화인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참화 속에서 사림들을 옹호하고 지킨 분이기도 하다. 공은 영일출신의 이번공과 월성 손씨 사이에서 출생해 인근 양동마을에 여강 이씨 집성촌을 형성시키며 그의 후손들은 포항지역에서도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월성 손씨 가문과 여강 이씨 가문의 문중(門中) 재사(齋舍)를 흥해 진산(鎭山)인 도움산에 터를 잡은 것은 음택(陰宅)의 대표적 길지라 볼 수 있다. 이조참판 손소의 묘소를 지키기 위해 세운 상달암과 1586년 손엽의 글씨로 문원공 회재 이언적의 묘앞에 건립된 신도비(神道碑), 달전재사는 경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양택(陽宅) 백년보다 음택(陰宅) 천년 간다`는 조선 선비의 길지 사상과 그 정신을 도음산 맥에서 느낄 수 있다.

회재의 후손으로 형성된 세거지는 임진왜란 후 피난지처(避難之處)인 기북면 오덕리 덕동마을과 신광면 우각리 여강 이씨 집성촌을 들 수 있다. 먼저 덕동마을 일대는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성법부곡(省法部曲)을 확인할 수 있는 곳으로 현재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에 편재돼 있다. 북쪽 성법령(省法嶺)을 향해 호리병 모양으로 뻗어져 있어 일찍이 활난가처(活可居)에 천하지낙양(天下之陽)으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특히 임진왜란(壬辰倭亂) 발발 당시 해주정씨(海州鄭氏) 가문과 인근 명문세족(名門世族)인 여강이씨(驪江李氏), 영천이씨(永川李氏) 가문의 피난처(避難處)로 활용되기도 했다.

덕동의 입향조는 해주정씨(海州鄭氏) 8세 언각공(彦慤公·1498~1556)이 경상감사와 청송부사를 지내면서 장원(莊園)을 축조하기 시작해 자(子) 신(愼·1538~1604)을 거쳐 임진왜란 때 선무원종 1등 공신 손(孫) 문부(文孚), 증손(曾孫) 대영(大榮)에 이르기까지 정문의 별서로 관리 조성됐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 북평사로 재직 중 의병활동을 한 정문부 의병장의 가솔들은 덕동마을에서 난을 피하게 됐고 왜란이 끝난 후 다시 세거지인 양주(楊洲)로 떠났다.

선생의 자(子) 대영은 같이 피난했던 여강이씨 가문과 우의를 돈독하게 하며 그의 셋째 딸을 향단공(香檀公·1567~1637)의 손(孫)인 강(1621~1688)에게 출가시켰다. 덕동마을 입구 용계정의 다른 이름인 사의당(四宜堂)은 이강의 호를 따른 것. 정문부 선생이 화를 입게 되고 그의 자(子) 대영이 세거지를 떠나 진주로 정착하는 과정에서 사위 사의당에게 덕동 일대의 재산을 상속하게 됐고 선생은 생애 대부분을 덕동에서 보내며 주자 성리학에 바탕한 은둔피세(隱遁避世) 선비상을 실현한 듯하다.

<계속>

/안수경(포항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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