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동화작가·곡강초등교 교사
오래된 일이다.

아침마다 동네 확성기로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지던 1970년대 중반이었다. 경북 봉화 산골학교에서 6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다. 한 학년이 3반까지 있었다. 대부분이 농사꾼의 아이들이었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전부였고 집에 돌아가서는 많지는 않지만 바쁜 부모님의 농사 일손을 도와야 하는 것이 당연한 때였다.

6월 더운 날이었다. 아이들이 돌아간 빈 교실에서 시험 친 것을 채점하고 있는데 옆 반 선생님이 들어서며 투덜거렸다.

“에이, 나쁜 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왜요? 누가 말썽이라도 부리는가 봐요.”

채점을 하다가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하였다.

쉬는 시간 음악을 채점하는데 반장이 자기 시험지를 보다가 담임이 가르쳐준 대로 답을 썼는데 틀리게 되자 돌아서면서 중얼거리더라고 하였다.

`에이씨, ○같이 가르쳐주어 틀렸네!`

그 말을 듣고 담임은 현기증이 나면서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하였다고 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꾸중을 할 수도 없어 못들은 척 하자니 매우 힘들었다는 것이었다. 혼자 화를 삭이느라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면서 퇴근하고 술이라도 한 잔 하자고 하였다. 군대에서 헌병대 근무를 하고 제대하여 복직한 혈기왕성한 선생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었다.

내가 6학년 때였다.

어느 날 나와 다른 한 친구를 칠판 앞으로 불러내어 `ㅂ`을 써보라고 하셨다. 두 기둥을 먼저 쓰고 가로 두 개를 그은 내 필순은 틀렸다고 하였다.

그 순간 나는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홉 살이 되어서 초등학교 2학년에 바로 다니게 된 나는 한글을 아버지에게서 배웠다. 1학년을 다녀보지 못했다. 한글의 필순을 바르게 배우지 못한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산골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버지 가르침대로 하여서 틀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리고는 `ㅂ` 의 필순을 고쳐 쓰기 시작하였다.

현직에 나와 2년째가 되던 해였다. 내가 공문서 작성하는 것을 옆에서 바라보던 선배 선생님이 웃으면서 중얼거리셨다.

“김 선생, 그 비읍 쓰는 것 순서가 잘 못 된 것 아니야?”

“선배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쓰는 것이 확실하게 맞지요. 아마 선배님이 잘 못 아셨나 본데요. 비읍은 이렇게 제가 쓰는 것이 맞아요.”

나는 자신 있게 이야기 하였다. 1학년을 담임하시던 선배 선생님은 잠시 뒤 국어 교사용 도서를 들고 오시어 내 앞에 내미셨다. 나는 교사용 지도서의 비읍 필순을 믿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것이 오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까지 1학년 담임을 하여 본 경험은 없지만 2년 가까이 내가 쓰는 `ㅂ`을 보면서 따라하였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이들 앞에 선다는 것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직 경력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4학년을 담임하던 작년에 국어의 관련 내용이 나와서 수업 중에 `우렁이 각시` 이야기를 하여 준 적이 있었다.

다음 날 아이들의 `선생님의 이야기 `구렁이 각시`가 매우 재미있었다.` 라는 몇 명의 일기장을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참으로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 시간 한 시간의 수업이 쉽지 않다는 두려운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질문을 즐겨하지 않는 우리 반 아이들이지만 원고지 쓰는 시간이 되면 묻는 것이 많아진다. 띄어쓰기를 묻는 것이다.

“선생님 `…못하다`는 띄어쓸까요 붙여 쓸까요?”

`잘 하다`의 반대는 띄어써야 하고 `할 수 없다`는 뜻은 붙여 써야 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여서 바르게 알 수 있도록 할 수 있겠는가. 우렁이 각시가 구렁이 각시로 둔갑하는 아이들에게.

그들은 담임이 가르쳐 준 것이니 자신의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나처럼 오랫동안 가슴에 묻고는 사용하게 될 것이 아닌가. 많은 경력이 쌓였지만 늘 아이들 앞에 선다는 것이 두렵다는 생각을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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