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종前 문경중 교장
소년 시절에 나는 소원이 한가지 있었다. 나의 시를 서울에서 나오는 유명잡지나 유력한 일간신문에 더도 덜도 말고 한 번만 발표되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열망했다.

1960년 12월 초에 육군에 입대했다. 1962년 여름 나는 서울 육군본부 행정병으로 부완감실에서 근무했다.

사무실에 배달되는 동아일보를 보니 국민시조부흥운동의 일환으로 동아시조를 공모하여 입선작을 주 1회 싣는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뽑힌 작품에는 원고료도 지급한다는 게 아닌가. 고 2시절 교내 백일장 최우수상 수상경력도 있고 하여 망설일 것도 없이 대뜸 투고를 했다.

투고하고 나서 3주일이 지났을까, 1962년 8월14일자 동아일보에 나의 처녀작 `고향 길`이 한 글자의 가감도 없이 그대로 원안대로 발표됐다. 부근에 있는 동아일보 보급소를 당장 찾아 게재신문 5부를 구입했다. 너무 기분이 좋고 마음이 설레어 머리맡에 신문을 놓고 잤다. 밤중에 대대장님이 내무반 순찰을 하시다가 `귀관은 잠도 안 자고 신문을 보는가?`라고 물으셨다. 그때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동아일보에 `고향 길`이 실린 그날만큼 기쁜 날은 단연코 없었다.

글을 뽑으신 심사위원이, 고심 끝에 지은 역작(力作)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으셨다.

첫 발표가 인연이 되어 `동아시조`가 13회 지속되었는데 내가 4회나 뽑혀 최다입선기록을 세웠다.

작품을 지으면서 시어가 마음에 안 들면 한글학회 담당자에게 고견을 묻고 조언을 듣기도 하였다. 그때 네 차례에 걸쳐 뽑힌 작품은 1. 고향 길, 2. 산골 아이, 3. 옥수수, 4. 종점 등이다.

원고료는 1편에 100원이었다. 그 당시 100원은 위력이 제법이었다. 실비식당 백반이 한 그릇에 10원이요, 호떡은 10원에 12개를 주었고 서울시내 버스비가 5원, 전차는 2원이었다.

유일한 문학잡지 `현대문학`도 한 권에 40원 했다.

그때 고료 10원이 지금으로 치면 3만원 정도 된다고 생각한다. 원고료를 받으러 동아일보 문화부를 찾았을 때 후임 장관이 된(김영삼 정권) 권영자 기자가 원고료를 챙겨 주었다.

권 기자님이 문경 바로 옆의 예천 분이란 건 나중에 알았다.

몇 푼 안 되는 원고료지만 내 성격이 긍정적으로 되는데 일조를 했다.

지금도 동아일보사 원고료 봉투가 내 스크랩북에 정중히 모셔져 있다. 그때 `동아시조`에는 130여 편의 시조가 뽑혔다.

독자란에 모습을 보인 아마추어 시인들 중엔 20여 명이 신춘문예 당선, 전문잡지 신인추천 등으로 문단에 진출해 민족 정서 진흥에 이바지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문학면에도 크게 이바지를 한 고마운 신문이다.

어떤 잡지를 보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1962년 동아일보 `동아시조`에 입선한 것을 문단데뷔로 가름했는데 나도 동아시조에 네 번이나 입선을 했으니 문단데뷔를 앞당길 수 있지만 지금대로 1967년을 데뷔 원년으로 고수한다. 지금은 내 시선집에도 밀려난 `고향 길`을 소개하여 애독자들과 당시의 풋풋한(?) 감동을 나누고자 한다.

`고향 길`

김시종

어쩔 수 없이 떠나는

야속한 길

오실젠 기쁨만이

가실젠 서름한 길

재회를 못내 비옵던

다사론 이 길이여.

서름한/ 못내 비옵던/ 다사론 등 고유한 우리말을 짧은 시속에 구사한 것이 특색이기도 하다.

`동아시조`란에 김정효님의 `내 마음`이란 소품이 만 47년의 세월이 훌쩍 흘렀건만 내 마음에 지금까지 선명하게 남아있다.

`내 마음`

김정호

문득 그리우면

떨쳐 입고 찾아가서느

차마 보고 싶어

찾아왔단 말 못하고

열번도 더 읽은 책만

빌려 안고 옵니다.

얼마나 안쓰런 사랑을 잘 나타냈는가.

짧은 글이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기량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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