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 서양화가
해넘이를 하다 보면 지나온 세월이 늘 뒤돌아 보인다. 50Km로 내리막을 달려가는 내 인생을 보는 것 같아 새해가 그다지 시답잖다. 그래서 또 하나의 추억을 곱씹는다. “이놈이 저놈을 치고, 저놈이 이놈을 치며, 죽고 죽이는,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영화! 사상 최고의 스펙터클, 시네마스코프 총천연색,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50, 60년대 우리나라 시골구석을 돌던 가설극장 확성기 소리다.

삑삑대는 스피커소음이 한적한 시골을 그렇게 휘젓는 날이면 온 마을 사람들이 한밤 개천바닥에서 벌어질 영화구경에 마음 설레기도 했다.

폐기 직전 필름에, 고물 외제영사기, 돌아갈지 의문인 발전기로 상영되던 가설극장의 풍경을 떠올리노라면 아련한 향수가 되살아난다. 너무 낡아빠져 자막 글자를 알지 못했던 것이라든지, 중간에 꺼져버린 발전기를 고치느라 20, 30분 기다리기는 예사, 배우의 입술과 대사가 따로 노는 괴상한 화면이었지만 그래도 그 속에 빠져 울고 웃었던 그 추억을 떠올리노라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대형화면에 빵빵한 냉난방 시설, 푹신한 안락의자에 편안히 앉아 영화를 즐기는 지금 세대들에겐 상상도 못할 정겨운 추억을 안겨주었던 것이 가설영화였다. 그렇게 열악하기 짝이 없던 우리의 영화산업도 불과 반세기를 못 미쳐 지금은 세계적인 경쟁력을 지니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요즘은 영화들이 주제 설정에서부터 촬영기술에 이르기까지 대형화의 추세를 띠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컴퓨터그래픽이 동원되면서 제작비도 천문학적이다. 얼마만큼 자연스러운 현장감을 주느냐가 흥행의 성패를 좌우하기도 한다. 얼마 전엔 `해운대`라는 영화가 대박을 쳤다.

도시가 엄청난 해일로 파괴되는 모습을 컴퓨터그래픽으로 실감 나게 묘사한 덕분이라고 한다.

최근 들어 전 세계영화시장을 뒤흔들며 연신 최고기록을 경신한 영화가 있다. `2012`이라는 영화다. 재난영화의 귀재로 불리는 미국의 에머리히 감독이 그의 작품 `인디펜던스(96)` `투모로우(04)`에 이어 또다시 돌풍을 일으킨 작품이다.

우리 돈 3천억 원에 달하는 2억6천500만 달러가 제작비로 들어갔다고 한다. 전 세계 영화시장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키니, 개봉한 지 열흘도 못돼 제작비를 모두 건졌다는 소문이다.

대부분의 화면이 컴퓨터그래픽에 의존했다지만 현실감을 더하기 위해 다른 어떤 영화보다도 실제와 흡사한 세트를 많이 동원했다고도 한다.

영화의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고대마야문명으로부터 끊임없이 회자되어 온 인류 최후의 멸망이 2012년이라고 했다. 그것을 신봉하는 마야인들의 집단자살이 일어나고 세계 곳곳에서는 지진, 화산폭발, 거대한 해일 등 각종 자연재해들이 발생하면서, 인류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하는 징후들이 나타난다. 저명한 과학자들은 오랜 연구 끝에 실제로 멸망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각국 수뇌부에 이 사실을 알린다.

두 아이와 함께 가족 여행을 즐기던 잭슨 커티스(존 쿠삭)는 인류 멸망을 대비하기 위해 진행해 오던 정부의 비밀 계획을 알게 되는데….

과연 잭슨이 알아차린 정부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창세기 6~8장의 대홍수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계획이었다. 하나님 자신이 창조한 이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찬 것을 보고서 더 이상 그대로 둘 수가 없어 물로서 심판하려 한다. 그 계획을 노아에게 미리 알리어 방주를 짓게 하고 지상의 모든 생물 한 쌍씩을 방주에 싣게 한다. 그리고 40주야 비를 내려 세상을 멸절시킨다. 바로 이 내용을 고대마야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지구멸망설에 매치시킨 것이다.

등장인물 중 한 어린이를 `노아`로 설정한 것도 에머리히 감독의 제작 의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실마리다. 그는 지금 이때가 노아 시대와 다름없다는 전제하에 이대로 간다면 결국 인류가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될 가장 무서운 재앙에 직면할 것이라는 점을 우회적으로 설정한 것임을 느낄 수 있다. 최근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은 코펜하겐의 기후변화회의와도 결코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대비치 않으면 결코 2012의 재앙을 피할 수 없다고 해서 이를 너무 앞서가는 상상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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