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종前 문경중 교장
연말이 가까워 오니 술판이 늘어난다. 한해 한 번도 못 만난 지인들이 술자리에서 감격적인 해후를 한다. 술꾼들은 자나깨나 밤낮 술 먹을 핑계만 찾는다. 농부 K씨는 밥보다 술을 더 좋아한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술 고픈 것은 못 참는단다. 농부 K씨는 술 먹을 구실이 없으면 논 뚝 무너진 셈치고 실제로는 안 무너졌으니까 수리비가 안더니 그 돈으로 술을 마신단다. 술자리에 앉은 모습들을 보니 세상근심은 탈영을 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물씬 난다. 사실 필자는 술에 대한 글은 쓸 자격(?)이 없다.

육십 평생에 내가 비운 주량이 술 반 되에도 미달이다. 여러 차례 `KB 주`문학상에 서류를 냈지만 그때마다 고배를 마셨다. 평생 소주 한 잔 마시는 일이 없는 내 사정을 어찌 알고 번번이 퇴짜다. 하기야 술꾼들에게 번 돈으로 상금을 주는데 `KB 주`한 병 팔아 준 적이 없으니 내게 상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고 자위하다가도 심사위원들이 만취상태에서 심사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이 든다. 나를 비켜간 `KB 주`문학상이 야속하기도 하지만 나보다 우수한 문학인들이 그렇게 많으니 우리나라 문학의 앞길이 밝기만 하다. 상은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올바르게 운용하는 것이 더 절실하다. 나는 술상 앞에 아예 앉지도 않지만 TV 화면에 나타난 남의 술판마저 외면할 수가 없다. 농촌에는 사람이 없어 빈집이 많지만 도시엔 밤으로 술집마다 인산인해를 이룬다. 술안주는 불판에 돼지고기가 지글지글 아우성이다. 한 해 한 번도 못 만나는 사람들끼리 술잔을 만들어 못다 푼 얘기 보따리를 터뜨린다. 말은 실이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로프다.

일제히 잔을 들어 건배할 때 새로운 구호가 만발하는데 그 중 제법 쓸만한 것이 있다. `오바마`, `원더걸스`, `변사또`, `오징어`등 셀 수 없이 건배 구호가 많지만 `변사또`와 `오징어`를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변사또`란 구호는 변-함없이, 사-랑하며 또-만나자란 주당들의 결속 구호다. `오징어`란 오-래도록 징-그럽게 어-울리자란 뜻이란다. 아주 재미있지 않은가. 식량사정이 어렵던 지난날 우리 겨레는 밥보다 익살로 굶주린 배를 채웠다.

변(卞)씨는 역사에 흔한 성은 아니다. 그러나 캐릭터가 분명하다. 춘향전의 변학도 사또(남원부사) 허생전의 변 부자(변승업), 가루지기타령의 변강쇠 등 일당백의 개성이 철철 넘친다.

변학도 남원 부사는 영계(?) 춘향이를 작살내려던 탐욕적인 인물로 그려졌지만 사실은 변사또는 그 당시 지방관의 전형이었다. 이몽룡이 대과에 장원 급제하여 호남암행어사가 된 것도 완전히 뻥이다.

대과에 장원급제라면 초임 관직이 종6품이 되었으나 암행어사는 행정실무경험이 있는 정6품 관으로 임명되었으니 이몽룡의 암행어사 임명은 현실이 아니고 민중들의 염원이었을 뿐이다. 전라도 남원지방에는 `춘양이`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춘양이는 콩 멍석에 넘어진 얽뱅이로 사또 수청을 거절하다가 곤장 맞아 죽었다고 한다.

`춘향전`보다 `춘양이`전설이 더 현실적이다. 일부 고위직 인사들이 뇌물을 수수하여 검사실이 요즘 분주하다. 부정한 돈으로 호화판 술판을 벌이지 말고 변사또 같은 고위층도 양주 대신 소주를 술상에 올리고 오징어를 안주로 하여 조촐한 술자리를 가끔 하는 것이 개인이나 나라를 위해 더 창조적일 것 같다.

인류의 역사는 남자(!)의 역사요, 남자의 역사는 술의 역사다. 중진시인으로 술 한 잔도 못한다고 핀잔들이지만 참된 시인이 되자면 술보다 여행길에 들어야 한다. 술 잘 마시는 게 자랑일 수 없다.

애주가도 부디 절주를 잊지 마시라. 술 안 속에 들어가면 간호사 면허증도 없이 주사질 하는 이들에게 인류평화를 위해 무면허 주사질(술주정)하지 않기를 우정어린 충고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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