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락 / 포항장성요양병원장

살아 있는 생물들이 마지막으로 가야 하는 곳으로, 모든 생물에게 공평하게 분배되는 죽음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질식, 절망, 불가피한 것으로 여긴다. 이것은 문이 꽉 닫힌 콘테이너 박스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숨이 막히고 희망이라는 것은 휴지에 써서 창밖으로 버리는 단어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또 그 이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모두 두렵게 생각한다.

어쩌면 종교도 고난으로 가득한 인생 문제에 대한 괴로움과 죽음의 두려움 때문에 만들어 졌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망을 보통은 끝, 절망, 또는 문제해결로 보며, 삶의 마지막에 있는 단단히 묶인 야무진 매듭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어려운 상황(문제)을 해결하기 위해 자기를 죽인다든지(자살) 다른 사람을 죽게 하는(타살) 방법의 선택을 드물게는 보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란 서로 얽혀서 더불어 살아야 하고, 다른 사람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므로 자살은 문제 해결이 아니라 무책임하게 자기를 방기 하는 것이 된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언급은 되도록 피하려 한다.

일상적인 대화 때나 또는 훌륭한 삶의 영위 문제를 이야기 할 때에는 죽음이 삶의 한 부분인데도 애써 사각지대에 두려고 한다. 종교마저도 자살과 타살을 극히 나쁜 것으로 결론 지운다.

근래에는 죽음의 무게가 가벼워 졌다. 인도 몸바이에서는 주검을 쓰레기 치우듯 치우기가 바쁘다고 한다. 이것은 삶과 죽음이 모두 헐값이 되어버리는 것으로서, 외경심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빈소에도 희희낙락의 풍경을 보게 된다. 죽음으로 짐 되고 부담되었던 한 가지 일이 해결되었단다. 땅을 치는 통곡소리는 옛날이야기다. 값이 싸진 죽음을 전제로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사람이 사람 구실을 못하는 것으로서, 삶다운 삶이 아니다.

요즈음 죽음은 콘트롤해야 하는 불가피한 사회적 현상으로서 사망률 관리에 관심을 둔다. 어떻게 관리해야 복지 국가가 되는지, `오늘의 사고` 등을 알아야 모두 아는 것처럼 통계 숫자의 조절에 관심을 많이 둔다. 이러한 죽음 이해는 `죽음 관(觀)`이 아니고, `죽음의 지식`수준일 뿐이다.

삶이 헐하면 사람값도 헐하고, 이는 사람 구실을 못한다는 뜻이 된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그것은 단단한 매듭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 구실을 하기위해서는 삶만큼 죽음에 대해서도 무게를 두어야 한다.

삶과 죽음이 합하면 `커다란 삶`이 되므로, 죽음도 삶의 일부로 인식하고 내팽개 처서는 안된다.

우리는 멀리 있는 죽음은 설명을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바짝 바짝 내게로 닿아오면 점점 모르게 되는 것이 죽음이다. 나의 가족의 죽음은 그냥 설명이 가능한 지식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실존적 고뇌로서의 죽음`이다.

부모와 자식의 죽음에도 `당연과 당연하지 않음`이라는 차이가 있다. 부모의 죽음은 당연할 수 있지만, 자식은 일생 간 가슴에 묻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배우자의 죽음도 슬픔이 넘쳐나지만 실제에 있어 자기의 죽음이 아니다.

자기 죽음에 봉착하면 어느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죽음이 바싹 내게로 다가옴을 확실히 느낀다면,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그것은 의미가 없어지는 등 텅 빈 마음이 된다. 남의 죽음은 사망자의 통계에 +1을 하는 것에 불과한데도, 자기의 죽음은 온 천하가 푹 꺼지고, 내리 뭉게지는 것이다.

어떤 죽음이든 우리는 지식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실존적 고뇌의 수준까지 끌어 올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죽음을 `마지막 남은 신비와 외경`으로 여기고 죽음이후의 문제를 내 정서 속에 담을 수 있는 `죽음 관`을 가져야만, 죽음을 값싸게 여기는 문화 속에서 우리를 건져 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