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포 / 포항기계중앙교회 담임목사
오늘 예수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예수가 진정 우리의 구세주라면, 또한 우리의 벗이라면, 우리는 이 질문을 피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서 신자들의 신앙과 삶의 내용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만약 예수를 하늘에만 계시는 초월적 구세주로 생각하는 신자는 아무래도 이 땅, 이 역사보다는 영혼구원이나 내세의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를 이 세상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속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신자는 하늘보다는 땅, 내세보다는 현세, 그리고 신비하고 추상적인 것보다는 역사적이며 구체적인 삶의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갈 것이다.

예수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 한가운데 들어오셨다. 마구간처럼 초라하고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곳에 오셨다. 그곳은 사람 냄새나고 짐승 냄새나는 시골 베들레헴이었다. 또한 그곳은 서민들의 일상이 젖어 있는 끈적끈적한 삶의 현장이기도하다.

신앙과 현실, 신앙과 역사, 신앙과 이성은 적대적인 것이 아니다. 신앙이 하나님의 선물이듯 현실과 역사와 이성 역시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소중한 선물이다. 현실을 분별할 줄 아는 이성이 없이는 신앙은 자칫 미신이나 비현실적으로 전락하고 만다.

2천년 교회사가 가르쳐 주는 대로 이성을 등진 신앙은 맹목적인 신앙으로 빠져들어 엄청난 오류를 범하기 십상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이성을 내리누른 중세 기독교가 무려 1천 년에 이르는 암흑시대를 초래했던 것은 그 대표적인 실례이다. 신앙과 이성은 때로는 서로 견제하고 때로는 다정히 협력하면서 함께 굴러가야 할 두 개의 수레바퀴인 것이다.

성경 전체는 어디까지나 구체적인 삶의 상황을 밑바닥에 깔고 이 소용돌이치는 삶 속에서의 구원을 성찰하고 고백하는`역사적` 현장이다. 따라서 신앙과 현실, 신앙과 이성의 창조적 긴장과 협력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오늘 예수는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신학적`상상력`과 함께 실천적`이성`을 필요로 하는 물음이다. 이것은 뜬구름 잡는 상상력이 아니라`역사적`상상력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실천적 이성과 반성 그리고 성찰을 요구하는 물음이다.

예수를 이 세상에서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된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옥에 갇힌 사람 가운데서 발견한다. 아니, 그런 사람과 예수를 `동일시`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고난 받는 이웃의 얼굴과 아픔에서 그리스도를 감지하고 있는가? 한국교회의 `정통` 교리와 신학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친구인 예수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는가? 이 땅의 목회자들 중에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인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포하는 이들이 그 얼마나 되는가? 예수의 참으로 인간적이며 민중적인 모습에서 그리스도를 느끼고 이 예수를 닮아 살려고 애쓰는 교인들은 또 얼마나 되는가? 이 땅의 교회와 신자들 역시 `세속화`와 `귀족화된 종교` 때문에 저 `유대교의 실패`를 고스란히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 한국교회는 냉철한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 예수를 교회 안에, 교회의 도그마 안에, 그 숨 막히는 교리와 신학 체계 안에 꽁꽁 가둔 채,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외면하고 있는 오늘의 자기 모습을 참으로 부끄럽게 여기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해야 한다.

성탄은 하나님이 인간이 된 사건이다. 예수의 인간화, 인간의 예수화, 인간성 회복으로서의 새로운 지향 점을 찾아야 한다. 이러한 성찰을 거치지 않는 한 한국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사적 소명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신앙에 기대어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고유한 운명을 깨닫는 사람, 예수에 기대어 인간화를 자기 생의 소명으로 삼는 사람은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이다.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