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락 포항장성요양병원장

죽음에 대한 생리학적 정의는 `노화란 생리적인 기능이 회복 불가능하게 퇴행 현상으로 접어드는 것이고, 그 끝은 기능이 정지되는 죽음`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상태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 이유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고, 죽음 이후는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천당, 지옥, 윤회, 영과 육의 부활, 연옥 유무, 등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주 먼 옛날에는 어려서 죽거나 원한이 사무쳐서 죽는 것 이외에는 죽음을 건넛마을로 가는 것 정도로 별로 두렵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죽음을 공포 속에 찌든 것이라기보다 문지방을 넘어서는 통과 의례로 보았고, 죽음을 계기로 해서 다른 삶이 펼쳐지는 마디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죽음이 굉장히 두려워질 즈음에 많은 종교가 탄생하였다.

기독교는 죽음을 저주로 여겼고, 죄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사면 은총이 없다고 했다.

창세기의 타락이야기는 죽음을 경험한 이후에 쓰여 졌다. 불교에서 죽음은 인간의 욕심의 결과로서 이는 아주 지극하게 해결해야 할 고통의 문제로 보았다.

근래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전보다 훨씬 덜 한 것 같다. 특히 젊은이들은 아예 경청하려 하지 않는다. “아! 죽으면 되잖아요. 죽으면 죽죠. 눈 감아 버리면 되는데, 뭘 하러 생각해요” 라고 하면서 헐값으로 처리해 버린다.

현대의 죽음 관에는 몇 가지 크나큰 특성이 있다.

첫째는 개인의 죽음과 같을 정도의 무게로 인간이라는 종(種)의 소멸이 문제가 되고 있다. 자연 공해, 핵폭발 등으로 지구 차원의 걱정이 되었다. 왜냐하면 과거에도 `종의 소멸`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위기의 원인은 자연 과학의 발달 때문이고, 그것을 불교에서는 인간의 욕심이 낳은 것이라고 한다. 욕심은 어리석음에 빠지게 하고, 사물을 바로 볼 수 없게 한다. 그리고 인간 욕심의 산물 축적이 자연과학의 발달로 보았다. 좀 더 편하고 좀 더 잘 살아보자는 욕심을 현실화하기 위하여, 만족을 향해 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자연과의 갈등이 생겨나고 그 결과 인간의 삶은 전부 인공적인 산물로 채워진다.

예를 들어 옛날에는 물을 그냥 마셨으나 지금은 인공적으로 저수, 화학 처리, 정수, 여과, 배관 등 부자연스러운 인공적인 계통을 거친 수돗물을 마시게 된다. 또 인간은 과거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편히 살고 있다.

둘째는 죽음은 신비로워야 하는데, 과학적 분석이나 증명 같은 것으로 다루려고 한다. 죽음을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깊은 차원(신비)으로 승화시키고, 삶의 현실에 대해서는 경건함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신비감은 자연스러움과 밀착되어 있지만, 인위에 의해 자연스러움을 파괴했기 때문에 신비가 깃들 공간이 없다.

자식을 흙으로 묻고 난 후 어느 시인은 “밤에 그 애가 새가 되어 날아왔다. 나는 그새를 가슴을 파고 묻었는데, 아침에 내 가슴을 열고 하늘로 날아갔다”고 시를 썼다. 이때 신비가 사라져 버리면 그 새는 가슴에 묻을 수도, 아들이 새가 될 수도 없다.

신비의 소실은 죽음뿐 만 아니라 탄생에도 있다. 과거에 성(性)이라는 것은 신성하였기 때문에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성은 신비 속에서 이루어지고, 생명과 연관된 행위이며, 생리적인 것을 몰라도 사랑의 행위로 자연스러워서, 태어남에도 경외심을 가졌고, 책임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자연 질서가 깨졌고, 생명 경시, 모든 것의 상품화, 성교육도 전부 피임 교육이다.

자연과학이 발달하여도 세상 모든 것에는 과학적 측면만이 아니고, 신성함, 신비함도 있다는 것을 자각할 때, 우리는 삶을 더 풍부하게 살 수 있고, 생명을 아낄 수 있으며 한 편의 시에서 큰 감동을 얻을 수 있다. 죽음의 이해는 `마지막 자연, 마지막 신비`의 각도로 보아야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