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철이다. 가사노동(어쩌면 모든 노동을!)을 버거워하는 편이지만 해마다 김장김치만은 손수 담가왔다. 내 어설픈 살림솜씨를 아는 지인들은 내손으로 김장을 했다고 하면 의외라는 눈치다. 시댁에서 가져오거나 친정 덕을 볼 거라고 생각한다. 그도 아니면 파는 김치를 애용할거라고 지레짐작한다. 그간 돼먹잖은 `가사노동에서의 해방`이라는 핑계로 제 게으름을 선전하고 다닌 때문이리라.

시댁 김치를 가져다먹기엔 양심 찾을 중년이고, 홀로이신 친정 엄마는 이웃에게 얻은 김치만으로도 차고 넘치니 딸을 위해 부러 김장할 일은 없다. 그렇다고 김치를 사먹을 만큼 생업에 바쁜 처지도 아니니 그간 좋든 싫든 김장을 해왔다.

밥상 차리기, 라는 주부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것이 김치이기 때문에 김장만은 게을리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허전한 식탁에 올릴 김치라도 냉장고 가득해야 안심되니까.

지난 주 드디어 김장을 했다. 내 생애 최초로 김장행사에 이웃사촌들을 초대까지 했다. 선하고 배려 많은 사람들이라, 나 아니라도 김장 도와주러 갈 이웃이 많았겠지만 기꺼이 함께 해주겠단다. 사실 스무 포기 남짓한 절임배추로 김장을 하는 건 한나절도 걸리지 않는다. 해서 그간에는 휴일을 이용해 남편과 함께 했다. 능률면에서는 남편과 후딱 해치우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웃과 함께 할 달콤한 시간이 기대되기도 했다. 남편은 `진작에 그렇게 할 것이지` 라며 반색했다.

정성껏 김치를 버무려 줄 이웃을 초대해놓고 보니 점심 걱정이 앞섰다. 갓 담근 김치에다 굴 곁들인 보쌈으로 해결하면 된다지만 수육조차 제대로 삶아 본 기억이 없다. 보쌈을 시켜먹는 최악의 경우만은 피하고 싶었다. 숫제, 김장은 뒷전이고 보쌈용 편육 삶기가 최대 과제가 되어버렸다. 인터넷을 뒤진다, 이웃에게 물어 본다, 궁리 끝에 독서모임의 인생 선배 한 분의 가르침을 접목한 편육 요리(?)에 도전하기로 했다.

착하고 다정한 이웃들이 배추 속을 넣는 동안 나는 주부라면 익히 알고 있을 돼지고기 삶기에 도전했다. 인생 선배의 노하우는 압력솥과 통후추와 월계수잎이었다. 압력솥 자박한 물에 고기를 넣고 통후추와 월계수 잎 넣는 것만 잊지 않아도 실패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기본에다 된장, 커피, 와인, 바질, 양파, 생강, 대파, 마늘 등 다국적 양념 및 향신료를 조심스레 첨가했다. 깊은 맛은 못 내더라도 누린내라도 없애야겠다는 맘이었다.

맑은 햇살이 창을 뚫고 마루로 전진해왔다. 압력솥 추가 돌아가고 고기 익는 냄새가 집안에 감돌았다. 김장 속같이 걸쭉하고 매콤한 얘기들이 덩달아 쏟아졌다. 있는 그대로 서로를 인정하는 아줌마표 수다가 이어졌다. 저마다의 일상을 얘기하는, 굵거나 잔잔한 목소리 속에는 큰 울림이 숨어 있었다.

괜히 마음 한구석이 충만해졌다. 조엘 오스틴의 `긍정의 힘`(긍정의힘, 2005) 한 구절이 떠올랐다.

`우리 마음은 자동차 변속기와 비슷하다. 자동차 변속기에는 전진기어와 후진 기어가 있는데, 우리는 차를 운전할 때 어떤 기어를 넣을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뜻대로 인생의 행로를 결정할 수 있다. 우리가 긍정적인 생각을 품고 하나님의 복에 마음을 두기로 결정하면 어떤 어둠의 세력도 목적지에 이르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러나 부정적인 생각을 품고 불가능만 바라보는 것은 후진 기어를 넣고 승리에서 멀어지는 일이다.` (127쪽)

옳은 말만 하는 인생지침서를 보면 옳은 말만 떠벌이고 실천하지 못하는 여러 상황들이 떠올라 거부감이 든다. 하지만 흐트러지고 무너지기 쉬운 하루, 내면의 동요를 느낄 때 스스로를 다독이는 처방전으로 이런 책이 필요할 때도 있다. 긍정의 감기약 같은 이 책 한 구절이 이웃들과의 다정한 한 때와 겹쳐진다.

(소설가)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