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이는 적당해야 오래 간다. 넘치면 오해가 잦아지고, 모자라면 우울이 깊어진다. 오해가 잦으면 피곤해지고, 우울이 깊으면 자괴감에 휩싸인다. 오해의 상처를 건너지 않고, 우울의 진저리를 맛보지 않기. 누구나 그런 관계를 꿈꾼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과잉과 고립 사이 그 `적당함`의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 사이는 쉽고도 어렵다.

나들이할 때 내 차에 동승하는 지인이 있다. 오늘, 차에 오르자마자 그녀는 손에 들고 온 우유 한 팩을 급하게 마셨다. 약속 시간에 늦은 터라 식사대용으로 가져 온 것 같았다. 너나 할 것 없이 바쁜 아침, 분주했을 그녀의 외출 준비 상황이 떠올라 마음이 짠했다. 한데 그런 연민도 잠시, 나는 당황했다. 우유를 다 마신 그녀는 빈 팩을 꾹 눌러 접더니 차 안을 두리번거렸다. 설마 이 좁은 차안에서 우유팩 버릴 곳을 찾는 건 아니겠지, 그런 내 생각이 오해이기를 바랐다.

볼일을 본 뒤 그녀를 내려주고 친구를 만나러 갔다. 친구의 리모델링한 사무실을 구경하러 가는 중이었다.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지만 나는 그 친구를 좋아하고 존경했다. 자신의 일에 자긍심을 가지고 있고, 열정적인데다 성실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선물할 빨간 하트 모양 화분을 사서 조수석에 싣던 나는 살짝 기분이 상했다. 보조석 바닥에 꼭 눌려 접힌 우유팩이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불쾌한 감정보다는 설마 했던 내 생각이 맞았다는 것에 황당함이 밀려왔다. 어째서 쓰레기를 차 안에 두고 내릴 생각을 했을까? 내리면 곧장 휴지통이 있다는 걸 알면서 그걸 들고 내리는 수고가 그리 컸을까? 어쩌면 사소한 일일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무신경이 마음에 걸렸다.

마침 멋지게 변한 친구의 사무실 내부를 감상하노라니 눈과 마음이 정화되어 갔다. 깨끗한 사무실에 앉아 좋은 사람과 나누는 담소는 정겨웠다. 친구의 그 어떤 말도 미덥고, 그 어떤 충고도 달갑기만 했다. 두어 시간의 수다를 떨면서도 지겹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깟 차 안의 쓰레기 따위는 잊어버렸다. 일에 대한 친구의 열정과 비전을 들으며 나름의 각오를 새기기까지 했다. 적극적이고 에너지 넘치는 사람들의 긍정적인 마인드를 벤치마킹해야지, 하는 맘으로 충만하기만 했다.

그런데, 차 바닥의 구겨진 우유팩을 들고 집으로 돌아올 때 다시금 바늘 끝 같은 마음이 돋았다. 하지만 우유팩을 씻어 쓰레기 분리함에 넣으면서 곰곰 생각했다. 차안에서 버릴 곳을 찾아 두리번거릴 때, 그냥 두고 내리라고 먼저 말할 걸. 그랬다면 내 맘이 편했을 걸. 그럴 리도 없겠지만, 하트 화분의 그 친구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내가 그처럼 황당해했을까? 아닐 것이다. 단순한 실수로 넘기고 스스로 친구를 위한 변명거리를 찾았을 것이다.

무릇 사람 관계는 장점보다는 사소한 것에서 단점이 부각되기 마련이다.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 건 그 단점을 커버할 만큼의 거리를 말한다. 타인을 충분히 좋아할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 그게 보장되지 않을 때 우리는 타인이 불편하거나 불쾌해진다. 하지만, 그건 상대의 잘못이 아니다. 타인에게 할애할 애정보다 내 마음 보따리가 작아서일 뿐이니까. 결국 모든 건 내 맘에 달렸다. 아직 수양의 길은 멀기만 하다.

그걸 알면서도 알랭 드 보통의 철학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청미래, 2007)에서 위안을 얻고 싶어지는 왜일까?

“다른 사람들과 누리는 행복은 두 가지 종류의 지나침에 의해 제한되는 것 같다. 하나는 질식이고, 또 하나는 외로움이다. 사랑의 경계에는 두 가지 요소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다. 늘 전자가 더 큰 위험이라고 생각했다.” (146쪽)

질식도 외로움도 과잉이면 곤란하지만, 더 위험한 것은 질식이란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 사이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한가 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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