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 스님 보경사 주지
“혜시다방(惠施多方) 오거지서(五之書)”.

장자(莊子)의 `천하`편에 보면 여러 분야에 박식한 친구가 있는데 그것은 그가 가진 다섯 수레 분량의 책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유만으로 유식해졌다는 말은 아니다. 읽고 충분히 이해했기에 다섯 수레의 책이 혜시의 것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는 한층 강조하여 다섯 수레정도의 책은 읽어야 비로소 남자로서 자격이 갖추어진다는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書) 사내라면 모름지기 다섯 수레 분량의 책 정도는 읽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혼란스러운 시대의 독서는 한편으로 부질없고 할 일 없는 사람의 잡기로 보일 수 있으나 현자들이 장부의 덕목 중 독서를 꼽았다는 것은 새겨둘 이야기이다.

당송팔대가의 한사람인 유종원(柳宗元)은 책을 옮기는데 소가 땀을 흘리고, 쌓으면 대들보에 닿았다는 한우충동(汗牛充棟) 이라는 말을 적고 있다. 조금 과장된 면은 있지만 다섯 수레 분량의 책을 의미하는 오거지서가 이제 소가 땀을 흘릴 만큼의 무게로 독서의 중요성을 말한다.

슈바이처는 진정한 책읽기에 관해 말한다. `독서는 단지 지식의 재료를 공급할 뿐이다.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색의 힘이다.` 그렇다 독서는 재료이다 그것을 완성품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아직 미완이며 제대로 쓰여지기 위해 거쳐야할 공정이 남아있다. 슈바이처는 그 재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으로 사색을 꼽는다.

사유하는 것이다. 내 존재가 포함된다. 존재하는 상황과 까닭이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 생각한다. 답을 찾으려 눈으로 읽었던 문자를 가슴으로 다시 읽어간다. 이 과정이 사색이다.

불교에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가르침이 있다. 문자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이다. 혹자는 이것을 두고 독서에 대한 부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글자에 얽매인 고정관념을 경계한 것일 뿐 무용을 말한 것은 아니다. 지식이 지혜로 업 그레이드 되기 위해 바탕과 함께 경험이 필요하고 반드시 반성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오직 글자에 묶여 경험과 반성을 외면 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세상을 보고 사람을 대한 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이것은 불교뿐 아니라 지혜로운 이들의 한결같은 가르침일 것이다.

책읽기 좋은 계절이 왔다고 한다. 사실 책읽기 좋은 계절이 따로 있겠는가.

다섯 수레분의 책을 읽고자 정했다면 계절을 가려 서는 분량 채우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서가에 꽂인 책들을 보며 수레 수를 가늠해 본다. 땀을 흘리는 소가 내 소인가?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書)`, 사내라면 모름지기 다섯 수레 분량의 책 정도는 읽어야 한다. 두보(杜甫)는 왜 이렇게 부담 가는 말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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