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종前 문경중 교장
불법집회를 하는 난동 시위자에겐 이 땅 같이 자유천지가 없겠지만 나는 자유가 너무 적은 느낌을 받는다.

지금 보는 신문이 보기 싫어 끊으려고 해도 보급소장이 말을 안 듣는다.

내가 보고 싶은 신문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왜 내가 지금 보는 모 일간지를 끊으려고 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날마다 한편씩 싣는 시가 내 눈에 거슬린다.

시의 내용도, 시인도, 선뜻 내게 다가오지 않는다.

한 편의 시 선정자는 대개 문화부 문예담당기자인 경우가 많다. 중앙일간신문 기자공채를 언론고시라고 할 만큼 합격하기가 힘들어 기자 본인도 자부심이 크고 딴 사람들도 기자의 권위를 쉽게 인정하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문화부 문예 담당기자가 특출한 시인이 아닌 것은 현실적으로 확실하다고 본다.

특출한 시인도, 남의 잘된 시를 식별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를 잘 짓는 시인도, 혹자는 남의 시 작품을 가리는 데는 수준 이하인 경우를 더러 본다.

시를 전문적으로 짓지도 않고, 시에 대한 전문성도 갖추지 못한 처지에 날마다 독자에게 좋은 시를 소개한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닐 것 같다.

명시(名詩)가 날마나 한편씩 소개할 정도로 많을 리 없고, 명시도 누구나 다 알아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선 잘된 시를 알아보는 시안(詩眼)이 있어야 한다.

시안이 제대로 안 된 사람은 바로 앞에 명시를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다. 한 달에 1,2회 정도 괜찮은 시와 만나는 경우도 있지만 날마다 고른 시를 보면 시안을 갖춘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껴진다.

유수한 일간신문에 실리는 시의 소개는 범상히 지나쳐선 안 될 중대성이 있다.

신문에 소개되는 시가 천하의 명시라고 쉽게 믿는 단순한 독자들이 많아 정선된 시를 소개 않고 범속한 시를 명시로 추켜 세우면 문학시장 형성이 잘못되어 알맹이도 없는 시집이 `슈퍼 베스트셀러`로 둔갑을 하게 된다. 문학가(창작인)들에겐 창작실력이 제일 중요한데 요사이 흐름은 창작실력보다 부수적인 요소가 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어느 신문 신춘문예당선을 했느냐보다 더 입김이 세다.

대학동문인 창작인과 평객이 한 통속이 되어 애드벌룬을 띄운다.

간혹 같은 대학출신이 아니더라도 작가와 평객과 출판사가 삼위일체가 되어 문학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실력이 최우선이 되어야 할 창작세계에도 세속적인 요소가 지배를 하고 있다.

사람이기에 친소관계가 있고, 문학뿐 아니라 매사에 친소관계가 크게 작용을 하고 있다.

세상살이에 문제가 없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 문제가 있기에 세상이 존재한다는 견해도 있다. 앞으로 신문에 시를 선정소개하는 기자나 시인은 자기와 친소관계를 떠나 학문을 하는 진지한 자세로, 명시를 발굴 소개하여 읽는 독자들에게 기분 좋은 마음으로 출발하여 밝은 하루가 되게 하고 시가 선정되어 소개되는 시인도 자기의 역작이 소개되어 독자들에게 역량을 인정받고 창작의 보람을 더욱 느끼도록 해야 될 것 같다.

시를 선정하는 신문사 기자나, 선고필자보다 훨씬 수준이 높고 시안을 갖춘 고급독자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지금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겠지만 앞으로 더욱 정성을 쏟아야 할 것 같다.

신문에 날마다 소개되는 시를 읽는 독자들도 수용하는 안목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신문에 나는 시와 해설이 결코 시 감상의 금과옥조(科玉條)가 아니요,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음을 익히 알아야 한다.

시를 날마다 소개하는 필자들은 명시를 독자들에게 소개하려고 애쓰지만 잘못하면 `명시 아닌 멍한 시`를 안내하는 경우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심 없이 명시 발굴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양심적 필자들에겐 진심으로 격려를 보낸다.

더 나은 신문의 내일과 시의 만발을 위해 우리 모두 깊은 관심을 기울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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