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신객원 논설위원·문화중고 총동창회장
내 나이 60대 중반이니 계절로 치면 가을 색이 완연하다. 그런 내 생애의 다시 보기 힘든 귀하고 귀한 문화재들이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기념 특별전`에 다 모였다.

단 9일간의 귀향을 끝내고 꿈같이 타향으로 돌아간 `몽유도원도(일본 덴리대 소장· 일본 국보)`는 늦은 밤까지 관람객이 장사진을 치는 신드롬을 일으켰고. 아마도 어느 순간은 몽유도원도를 감상하기보다는 떠밀려 나가기도 했겠지만 그래도 마음에는 한국회화사상 신라의 솔거(率去), 고려의 이녕(李寧)과 더불어 3대가(大家)로 불리는 안견(安堅)의 하나뿐인 진작(眞作)을 볼 수 있었다는데서 그 가치를 헤아리기 어렵다. 조선 전기회화의 금자탑으로 불리는 몽유도원도는 화가 안견이 1447년 안평대군(세종의 셋째 왕자) 이용(李瑢, 1418~1453)의 꿈 이야기를 듣고 사흘 만에 신들린 듯 그려낸 도원경이다.

1950년 전란의 후유증으로 어수선했던 시기 부산으로 골동상에 의해 밀반입된 몽유도원도를 사들이지 못해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는 우를 저질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봤지만 고가의 돈을 마련하지 못해 잡지 못했으니 이렇게 안타까울 수가….

꿈같은 9일 동안 6만1천123명이 몽유도원도를 관람했다.

평생에 기억에 남을 만한 명화가 또 있었으니 고려불화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다. 보타 낙가산 금강대좌에 결가부좌한 관세음보살이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맞이하는 모습이다. 하늘거리는 법의(法衣)에는 금박으로 아름다운 수를 놓았고 흰 사리 건너 속살까지 비치게 한 복식의 표현이 걸작이다.

현존하는 고려불화 `수월관음도`는 35점뿐이다. 이번 출품작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소장품이다.

또 대부분 높이 2m, 너비 1m 크기의 아담스러운 채색 고려 탱화는 160여점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는 호암·호림·용인대 등에서 외국에서 사들여온 7점이 모두 국보· 보물로 지정 됐으며 미국과 유럽 박물관에 10여점, 나머지는 일본의 사찰이나 사설미술관에 있다. 고려불화는 오랫동안 원나라 그림으로 잘못 알려져 왔으나 30여 년 전부터 한국·일본학자들의 고증으로 국적을 되찾았다. 필자는 지난여름에도 아들과 함께 일본 교도· 나라·오사카 미술관을 기웃 거렸었는데 한자리에서 이렇게 친견하니 미소가 절로 난다. 1973년 필자가 경주시 황남동 천마총 발굴현장에서 직접 취재 보도했었던 `국보 207호 천마도 장니(障泥)`도 바깥바람을 쏘이러 나왔다. 말안장에 늘어뜨려 말굽에 튕 겨 나온 흙이 옷에 묻지 않도록 한 장니(자작나무 껍질로 만들어 졌음)에 그려진 말 그림은 신라 회화 중 거의 유일한 작품이다.

워낙 손상 위험이 커 1973년 천년의 세월을 이기고 세상에 나온 후 딱 한차례 나왔을 뿐이며 이번에도 13일간만 전시하고 수장고로 들어갔다.

경주와 인연이 깊은 유물은 천마도장니와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본인 석가탑 무구정광다라니경(보물 126호), 보물 399호 서봉총 출토 신라 금관 등 여러 점이다. 물론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도 나왔다.

표주박 고려청자는 더 감미로워 포도 넝쿨 속에서 노는 아이들이 금방이라도 우루 몰려나올 것 같다. 조선전기 홍치이년(弘治二年)에 만들어진 청화백자(靑畵白磁) 송죽문호(松竹文壺)는 제작연대가 확실한 청화백자다.

높이 48cm, 호의 어깨가 당당하게 벌어져 있고 아랫부분은 잘록하게 다담아 져 조형미를 갖추었으며 소나무· 대나무를 청색 안료로 여백을 살려가며 그렸다. 1848년 창덕궁에서 열린 대왕대비 환갑잔치상도 8폭 병풍을 통해 구경한다. 문화는 이야기가 아닌가. 용산으로 옮겨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 전시관을 가득 메운 우리 문화재 하나하나에 낙동강 대하 같은 사연들이 세월을 잡고 휘돌아 흐른다..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