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절대권력 탄생 `일등공신`
`10·26`사건후 불우한 말년 보내

지난달 31일 노환으로 별세한 이후락(李厚洛·85) 전 중앙정보부장의 인생은 `권력무상`,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한번 번성한 것은 반드시 쇠함)` 그 자체였다.

그는 우리 현대사의 암흑기인 `유신(維新) 시대`를 대표하는 권력자였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은밀한 정치공작의 `대명사`였다. 이 전 부장은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 이듬해 3월 임관한 뒤 1948년 육군 정보국 차장을 지냈다.

이 전 부장이 권력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공보실장을 맡으면서부터. 1963년 박정희 의장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는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으면서 일약 권력 핵심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1969년 10월 박 전 대통령은 3선 개헌의 `후폭풍`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를 주일본 대사로 내보냈고,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도 해임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듬해인 1970년 12월 제6대 중앙정보부장에 임명되면서 다시 권부 핵심으로 복귀했고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총지휘, 명실상부한 `정권의 2인자`로 발돋움했다.

그는 중앙정보부장 재임 기간인 1972년 5월 `대북 밀사`로 평양에 파견돼 김일성 전 북한 주석과 사상 첫 남북비밀회담을 가졌고 `7·4 남북 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당시 이 전 부장은 판문점을 경유, 3박4일간 비밀리에 평양에 머무르면서 2차례에 걸쳐 김 전 주석과 회담했다.

김 전 주석과 이 전 부장의 회동은 심야에 이뤄졌으며, 김 전 주석은 당시 “민족의 분열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갈라져 있던 동포끼리 이처럼 만나고 보니 반갑고 감개무량하다”면서 조국통일 3대 원칙에 대해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부장은 그러나 1972년 10월 유신 체제를 확립하고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도하는 등 유신의 어두운 역사를 만든 장본인중 한명이다.

실제로 지난 1998년 6월8일 미국 국가안보기록보관소는 홈페이지에서 `1973년도 비밀 외교문서`라는 자료를 통해 이 전 부장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도했다고 밝혔다. 이 전 부장은 1973년 12월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박정희의 후계자는 이후락”이라고 밝혀 파문을 일으킨 소위 `윤필용 사건`으로 숙청된다.

`오뚝이`라는 별명대로 이 전 부장은 1978년 제10대 총선에서 자신의 고향인 울산에서 무소속 출마해 당선, 무소속 원내 교섭단체인 `민정회(民政會)` 회장을 지내다가 공화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10·26 사건`으로 박 전 대통령이 암살되고 신군부에 의한 제5공화국이 출범하자 영원히 정계를 떠나 지금껏 경기 하남에서 도자기를 구으며 칩거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권력자였지만 그의 말년은 불우한 나날이었다.

지난 2004년 부인이 당뇨 등 지병으로 별세한 뒤에는 노인성 질환을 앓기 시작해 최근에는 지인들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방 밖으로 거동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됐었다고 한다. 이씨 소유의 경기 하남시 자택과 땅은 보험회사 대출금을 갚지 못해 1999년 8월 경매돼 다른 사람의 명의로 넘어갔고, 앞서 경기 광주에 있던 도자기 요장과 땅도 1994년 매각됐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