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미를 알게 된 것은 오래지 않다. 책 읽는 모임에 친구 소개로 나타난 그녀는 한마디로 멀티패셔니스트였다. 작은 두상에 어울리는 시원한 망사 두건, 눈썹에 닿을 것처럼 날아오른 인조눈썹, 옷 색깔에 맞춰 단 귀걸이, 길고 가지런하게 손질된 손톱 등,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녀는 완벽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엣지있는 그녀의 멀티 패션은 예쁜 얼굴과 날렵한 몸매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우리 독서팀의 독보적인 인기인이 되어버렸다. 독서 토론 후, 점심을 겸한 친목 자리에서 이어진 그녀의 패션 강좌(?)는 책 읽는 즐거움을 앞질렀다. 귀걸이는 하의 색깔에 맞춰 달아 보세요. 머플러는 매는 방법에 따라 그 느낌이 달라요. 패션의 완성은 신발과 가방이니 소홀하면 안 돼요. 그녀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다 보면 몇 술 뜨지 않았는데도 배부른 느낌이었다. 패션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얘기인데도 그녀의 한마디는 사람을 몰입하게 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녀에겐 사람을 끄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녀를 매혹으로 이끈 건 그녀의 패션 감각이 아니라 그녀 자체였던 것이다.

그녀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밝았다. 바둑, 에어로빅, 노래교실, 종교 활동, 산악모임 등 그녀의 활동 반경이 넓은 만큼 그녀의 매혹 또한 커보였다. 그녀의 긍정적인 인품을 높이 산 우리는 급기야 독서회 부설 산악모임까지 결성해 그녀를 등반대장으로 임명해버렸다. 리더가 된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산행, 초보자들을 배려한 장소를 물색하고, 자세한 산행코스를 설명해주고, 운전까지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번거로운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찌푸린 적 없고, 진심으로 멤버들을 챙겼다. 그녀 덕분에 우리는 몇 달 동안 용장골에서 양학산, 도움산, 봉좌산을 거쳐 동대산 정상까지 오르는 희열을 맛보았다.

산행 중 담소를 나누며 찍은 사진에서, 일행의 시선은 하나같이 그녀를 향해 있다. 그녀를 향한 무한한 신뢰의 눈빛들, 그것은 그녀 긍정의 리더십을 증명하고도 남았다. 상대를 편하게 해주는 아량, 그 어떤 불편함도 만들지 않는 천성적 관용이 그녀에겐 습관이 되어 있었다. 마음이 태산인 사람에겐 까칠함도 다정이요, 마음이 지하 감옥인 사람은 다정함도 까칠함이 되기 쉽다. 그녀를 보며 내 지하 감옥을 생각한다. 내 좁은 식견에서 오는 강박과 욕망을 질책하고 반성한다.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공중그네`(은행나무, 2005)는 강박이나 욕망에 사로잡힌 현대인의 초상을 보여준다. 세상 범부들 대개, 욕망은 높으나 노력은 제자리걸음이다. 그 와중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커져만 가고, 그 두려움은 크고 작은 강박이 되어 자신을 괴롭힌다. 이런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을 두고 작가의 처방은 명쾌하다.

사람들아, 인생은 길고 욕망은 순간이란다. 그 인생 즐기려면 단순하고 낙천적이 되어라. 정신과의사 이라부를 등장시켜 무거운 삶을 가볍게 매친다. 쓸 데 없이 집착하고, 고민하고, 아파하지 않기. 내 영혼이 피폐해지는 건 과욕에서 오는 강박 때문이다.

단순하게 살기 위해 독자들은 기꺼이 이라부가 주는 유쾌한 비타민 주사 한 방을 맞는다. 제 안에 갇힌, 검붉게 탁한 욕망의 핏줄 밀어내고, 맑고 푸른 낙천의 비타민 온몸을 휘돌게 하고 싶은 것이다. 때론 공중그네 같은 삶의 곡예에서, 맨바닥에 나뒹굴더라도 그건 파트너의 잘못이 아니다. 내 손목을 놓친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내 안의 내가 스스로를 놓아버린 것임을 알자.

무시로 흔들리는 공중그네 같은 삶, 원한다면 비타민 주사 처방을 위해 책속의 이라부에게까지 달려갈 필요도 없다. 곁 돌아보면 패션리더이자 인생리더이기도 한 숱한 그녀들이 담백한 인생 처방전을 들고 손 흔들 터이니. 그들이 내미는 처방 또한 정신과의사 이라부와 다르지 않다. - 무거운 게 삶이니 가볍게 건너라고. 까칠함도 다정이니 타인에게 제 맘 덜어주라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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