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종 / 前 문경중 교장
좋은 선생님을 재학 중엔 잘 알아보지 못한다. 엄격하고 까탈스럽다고 느껴 학교 다닐 때는 불편하게 느낄 때가 많다.

박정희 대통령도 대통령으로 재직할 때보다 지금 훨씬 평판이 좋다.

사람이나 물건의 진가(眞價)는 당시보다 세월이 흘러가봐야 진가를 알게 된다.

늦은 깨달음이지만 영원히 깨닫지 못하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

1958년 고2 시절, 여름방학 과제로 학과숙제는 당연히 주어졌고 정부시책인 퇴비증산을 위해 고등학생들에게 건초 20kg을 해오도록 과제를 냈다.

요사이 20kg 쌀 한 포대를 들어보면 조금 무겁지만 부피는 별게 아니다.

마른 풀 20kg은 한 리어카 가득 채워야 되는 부피요, 무게다. 농촌에 살면서도 내 땅이 없어 농사를 못 짓는 집이 되어 낫인들 변변한 게 있을 리 없어 맨손으로 텃밭의 잡초를 뽑아 말렸다.

방학내내 뽑아 말린 것을, 개학날 들고 등교를 했다. 담임선생님이 검사한 결과 3kg으로 판정을 받아 17kg을 더 채워야 했다.

옆반의 담임선생님은 내 정도의 건초부피를 20kg으로 완납처리를 해주었다.

나는 17kg의 미달량을 채우기 위해 그 후 한 주일 동안 학교울타리 옆으로 흐르는 봇도랑에서 물풀을 뜯어 선생님께 검사받았다. 생풀은 마른풀 무게의 `오분의 일`로 계산해 주어 한 주일 내내 생풀채취작업을 해야 했다. 맨발로 봇도랑에서 풀을 건지다 사금파리에 발바닥을 다치기도 했다.

방과 후 특별보충 작업으로 20kg을 달성하여 홀가분하기도 했지만 한여름 땡볕에서 고생한 걸 생각하면 담임선생님의 융통성 없음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우리 담임선생님은 얼마나 엄격하고 정확하신지 0.5초 늦은 지각 1회로 개근상을 받지 못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순도 100%의 사회인으로, 직장인으로, 자타에게 공인받은 것이 우연이 아니라 고교시절 줄곧 3년 계속 담임을 맡으신 이대성 은사님의 지도 덕분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건초 2kg을 20kg 완납처리해준 옆반 선생님은 지금 생각하니 선생님이라고 볼 수조차 없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2kg을 20kg으로 처리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요, 사기다. 20kg이 20kg이지, 2kg은 20kg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어렵게 살던 1950년대에 고등학교를 다니고 졸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한 홀어머니의 외아들인 나를 딱하게 여겨 3년간이나 수업료 면제 혜택을 베풀어주신 이대성 선생님이 계셨기에 가능했다.

우리 집 사정에 맞는 학력은 `국민학교 4학년 중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나의 학벌에 대해 자랑도 자학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못 살았으면서도 뒤늦게나마 법학사가 되고 공립중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하게 된 것은 청상이 된 것을 숙명으로 알고 유복자에게 극진한 모성애를 쏟은 어머니 안복임 여사와 고교 3년간 학비 면제를 확실하게 해주신 담임선생님 이대성 은사님의 덕분임을 새삼스럽게 떠올려 본다. 보잘것없는 무명초 같은 필자에게도 어머님과 은사님의 희생과 사랑이 있었기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지금 못 산다고 불평하는 사람들 중엔 지난날 나의 젊은 청소년 시절에 비하면 재벌수준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정확히 파악하고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세우고 확실히 실천하는 데 성공의 비결임을 깨달았다.

조금 남보다 못 산다고 반사회적이고 과격한 폭력주의자가 되면 자신을 영원히 망치게 된다.

은사 이대성 선생님의 보살핌으로 고교 졸업장을 쥐게 됐고 수중 무일푼으로 고학하여 교대를 마치고 재학 중에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돈 안 들이고 국가고시를 돌파하여 중등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불우한 운명을 비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운명을 개척하고 늘 밝은 눈으로 현실을 직시하며 살았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준다.

매사에 감사하며 기도하는 자세로 살면 장애물도 저절로 없어진다. 가을날 마른 풀을 보고 건초 20kg 과제가 생각나고 이에 설킨 이야기를 풀다 보니 나의 지난날 자화상이 과대 노출된 것 같다.

결론적으로 인생은 살아볼 만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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