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영 / 서양화가
아시아의 신흥 산업국가로 거대한 중국이 거침없이 달리고 있다.

그래서 유럽이나 미국 등 선진국들이 경계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이러한 중국에 맞불을 당기듯 인도가 경제개발의 기치를 높이기 시작했다.

인도 역시 연간 경제성장이 중국 못지않다. 그래서 이런 고도의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중국과 인도를 합성하여 친디아(Chindia)란 신조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인도는 영어가 모국어처럼 통하고, 젊은 영재들이 넘쳐나며, 첨단산업의 보고라 할 만큼 IT 기반이 튼튼하다 보니 경이의 성과가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도는 아직도 수많은 사회적 난제들을 안고 있는 나라여서 반드시 중국과 같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예측이 어렵다.

인도의 지속적인 발전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 신분제도인 카스트다.

카스트는 한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떨쳐버릴 수 없는 숙명적인 굴레로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계급의 장벽을 말한다.

이러한 장벽을 인도에 뿌리박게 한 것은 소수의 침략자였던 아리아족이었고, 그들은 다수의 원주민들을 지배하기 위해 힌두교의 교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만들어낸 족쇄였다.

인도의 폐습인 카스트는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공식적으론 폐지됐다고 하지만 아직도 여전하다.

카스트는 크게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네 개의 계급으로 나누지만 이 카스트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최하층계급인 하리잔이 하나 더 있다.

이들 하리잔은 “접촉해서는 안 되는 인간들”이라는 뜻의 불가촉천민으로 불리어지는데 그 수가 3억 명에 달한다.

이들은 인도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아주 천한 직업에만 종사할 수밖에 없고, 근본적으로 `희망이라는 단어가 사치일 수밖에 없다.`는 의식에 길들여진 계층이다.

인도는 카스트는 하리잔을 포함해서 실제론 다섯 개의 계급이 있는 셈이지만 더 자세히 들어가면 수천 개의 계급으로 다시 나누어진다고 한다.

그러면 인도에서는 왜 이렇게 많은 계급이 생겨난 것일까? 그것은 바로 힌두교의 교리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이승에서의 선행과 악행, 즉 업보에 의해 다시 태어날 때의 계급이 결정된다고 보는 점이다. 선행과 악행에도 그 정도가 천차만별이듯, 받을 상벌도 천차만별인데다 환생할 때 받는 계급도 수천 개가 된다는 교리를 내세운다.

죽어도 다시 태어난다는 힌두교의 `윤회사상`은 이승에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노력보다 카스트라는 원초적인 운명에 복종해야 하는 숙명으로 묶어놓았던 것이다.

다른 종교처럼 인간은 한 번의 죽음으로 선행을 쌓은 정도에 따라 영원한 천국의 삶이 보장된다면 착한 일을 많이 하여 천국에 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힌두교의 교리가 인도인들의 의식을 옭아매어 놓았으니 그들의 종교가 바뀌지 않는 한 카스트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또한 카스트가 존재하는 한 힌두교는 인도인을 지배할 것이다.

수천 년간 대대로 믿어 온 종교가 사라진다는 것은 신앙이 무엇보다 중요한 인도인들에게는 곧 세상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도덕심의 근간이자 영원한 환생을 삶의 보람으로 인식하는 인도인들에게 힌두교는 결코 버릴 수 없는 믿음이다.

따라서 힌두교를 유지시켜주는 카스트는 결코 버릴 수 없는 버팀목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급변하는 글로벌화 물결 속에서, 인도사회가 어떻게 시대착오적인 카스트를 힌두교와 적절히 조화시켜나가야 하는가는 가장 큰 숙제다.

카스트의 상위계급들이 하층민인 수드라나 그 이하 계급인 하리잔을 얼마나 포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러한 폐습에 의해 저질러지는 인도사회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는 한 인도의 발전은 어느 땐가는 한계를 보일 것은 뻔하다.

이러한 인도를 보면서 `살아있는 신`을 섬기는 북한이 걱정된다.

인도보다 더 경직된 체제에서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고 한들 성과가 있을지가 의문스럽다. 계급의 족쇄보다 더한 독재의 족쇄를 풀지 않는 한 희망은 까마득하다는 사실을 북한은 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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